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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농촌 찬밥신세

Posted December. 09, 2004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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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방정부들이 각종 개발에 열중하느라 전체 인구의 70%가 넘는 농민들은 찬밥 신세가 되고 있다. 1949년 마오쩌둥()이 억압받는 농민을 위해 공산혁명에 성공했던 당시와는 완전히 딴판이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9일 산시() 성 북부 싼차완(차) 주민들이 개발 논리를 앞세운 지방정부에 농지를 빼앗기고 좌절하는 과정을 상세히 소개했다. 산시성은 마오쩌둥이 대장정을 마무리한 뒤 대열을 정비해 본격적으로 공산혁명에 나선 혁명의 요람이다.

개발 우선=싼차완 농민들은 2002년 초 인근 위린() 시 당국으로부터 경작 중인 농토를 내놓으라는 통보를 받았다. 시 정부는 모든 토지는 국가 소유라는 1951년의 애매한 법조문을 들이댔다. 싼차완에서 1.6km 떨어진 위린에서 석유와 천연가스 등이 발견돼 중국의 쿠웨이트로 떠오르자 개발 바람이 불었다. 장쩌민() 당시 국가주석이 직접 방문해 개발사업을 독려하기도 했다.

잇단 저항=싼차완 농민들에게는 675m(약 204평)당 60달러의 보상금이 돌아왔다. 이후 시 정부는 개발업자에게 보상금의 50배나 되는 돈을 받고 임대해 주었다. 농민들은 몰수나 마찬가지라고 격분하며 땅 찾기 투쟁에 나섰다.

2002년 12월 농민 800여 명은 16개 조로 나뉘어 번갈아 연좌농성을 벌였다. 5개월간의 농성으로 공사가 차질을 빚자 시 당국은 2003년 4월 시위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2003년 10월 농민 뤼잔두 씨(57)가 앞에 나섰다. 뤼 씨는 시 정부는 국민당 시절의 악질 지주와 같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는 2003년 10월과 12월 두 차례 농민대표를 이끌고 베이징()으로 가서 농민에게 농토는 피나 다름없다는 내용의 청원서를 중앙정부에 제출했다. 하지만 청원서는 위린 시 정부로 반송됐다.

강경 진압=올해 3월 농민들은 파업을 벌였다. 경작을 거부한 것이다. 산시 성 성장()과의 면담을 요구했지만 시 정부는 체포로 대응했다. 성난 농민들은 4월 시청사를 점거하고 연좌농성에 돌입했다.

당황한 시 정부는 농민 1인당 120달러를 주며 해산을 종용했다. 농민들은 돈을 받고도 해산하지 않았다. 농성 7개월째인 10월 4일 경찰관 2000명이 출동했다. 최루탄과 고무총을 쏘고 곤봉을 휘두르며 강제 진압했다. 주동자들은 공무집행 방해로 투옥됐다.

뉴욕타임스는 10년간 중국 전역에서 농민 1억 명이 싼차완 주민처럼 농토를 빼앗긴 것으로 추산된다고 전했다.



이 진 lee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