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04월 16일

“쾅” 64세 의사의 당당한 폭탄 의거, 당당한 법정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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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여진이 채 가라앉지 않은 1919년 9월 2일, 일제 제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경성 남대문역에 도착했습니다. 서울역이 생기기 이전 단층의 초라한 역사였죠. 사이토가 귀빈실에서 각국 영사, 식민지조선 귀족, 총독부 관리 등과 인사를 나눈 뒤 쌍두마차에 올라탄 순간 귀를 찢는 폭음이 터졌습니다. 사이토를 노린 수류탄이 날아든 것입니다.

수류탄을 던진 사람은 64세 강우규였습니다. 1919년 식민지조선인을 기준으로 볼 때 강우규는 할아버지였습니다. 이런 노인이 젊은이도 결행하기 힘든 의열투쟁에 몸을 던졌던 것이죠. 강우규의 의거 이후 식민지조선에서는 의열투쟁이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강우규 효과’라고 할 만한 현상이었죠.

1919년 10월 7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강우규 의사

하지만 그의 거사에도 불구하고 사이토는 무사히 떠났습니다. 현장에 있던 일본인 기자와 경찰 등 2명이 숨지고 35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습니다. 사이토를 환영하러 나왔던 식민지조선 귀족들은 얼굴이 노랗게 질렸죠. 이들 대부분은 “해가 지고 일본군의 경계선이 걷히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며 허둥지둥 발길을 돌렸습니다.

강우규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서 체포되기를 기다렸습니다. 경황이 없던 일본군과 경찰은 노인을 범인으로 의심하지 않고 지나쳤죠.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하느님은 사이토를 용서하고 또 강우규를 용서하심인가?’라고 자문하며 천천히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경성에 머물며 2차 거사를 궁리하다 보름 만에 붙잡혔죠.

동아일보 1920년 4월 15, 16일자에는 강우규의 2심 재판 기사가 실렸습니다. 창간 전인 2월 열렸던 1심에서는 이미 사형을 선고받았죠. 그는 재판 내내 노인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당당하게 행동했습니다. 얼굴에는 불그레한 기운이 가득했고 팔자수염을 쓰다듬으며 법정에 들어섰죠. “허리가 아프니 좀 편안한 의자를 내와라”라고 재판장에게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강우규가 살아온 인생이 알려졌습니다. 젊어서 한의학을 배웠고 나라를 빼앗긴 해에 북간도로 떠났으며 5년 뒤 요하현으로 옮겨가 신흥촌을 건설하고 광동학교를 세워 젊은이들을 가르쳤습니다. 3·1운동 영향으로 창립된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노인단의 길림성지부장이 돼 의거를 단행했고요. 사이토가 신임 총독으로 오는 것은 하늘의 뜻을 거스르고 세계의 대세인 민족자결주의와 파리평화회의를 교란한 것이라고 거사 이유를 밝혔습니다.

2심 재판에서 강우규는 원산에 있을 때 머물렀고 수류탄도 감춰놓았던 집의 주인 최자남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최자남이 이미 자백했다고 재판장이 몰아붙여도 공범은 없다고 강하게 말했습니다. 최자남 역시 고문으로 자백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죠. 2심에서도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범들이 풀려날 마지막 기회를 얻기 위해 상고했습니다. 상고는 기각되었죠.

그는 감옥 안에서도 꿋꿋했습니다. 옥바라지를 하러 온 아들에게 변호사는 필요 없다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태연한 자세로 성경을 읽으면서 옥중의 하루하루를 지냈죠. 아들에게는 “네가 만일 내 사형 받는 것을 슬퍼하는 어리석은 자라면 내 자식이 아니다.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너무 없어 도리어 부끄럽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11월 29일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에는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 단두대 위에는 오직 봄바람만 부는구나’라는 사세시(辭世詩)를 읊었습니다.

하지만 동아일보에서는 강우규의 마지막 모습을 찾을 수 없습니다. 9월 25일 총독부로부터 1차 정간을 당해 이듬해 2월 20일까지 신문을 발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서울역 광장에 동상을 세워 그의 굽힘 없는 기개를 보여주게 된 것은 의거 92주년인 2011년이었습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기사입력일 : 2021년 01월 22일
姜宇奎(강우규) 控訴公判(공소공판)


검사의 구형은 역시 사형
강우규는 끗까지 태연해
(작 지 계 속)

決行(결행)하든 瞬間(순간)
춍독 안 죽음만 분하고
그 외는 도모지 모른다


그다음 삼십일일 아침에 안국동 십구번디 윤이식의 집에 가서 피고 허형에게 아들 감용이가 도착하얏다는 젼보가 왓단 말을 드럿나냐? 그리하얏소. 아들이 왓스면 올나올 터인대 왜― 젼보를 노앗느냐? 아들이 아니라 나의 족하인대

이십여 년 젼에 집을 나가서 드러올 터인대 젼보만 보내고 나는 보지 아니하야도 관계치 아니함으로 젼보 안놋코 고향 덕원으로 간 것이오. 허형을 불너서 원산으로 아들을 가지고 오라고 보냇나냐? 그런 것이 아니라 편지를 하야 주고 한흥근의 집으로 호열자 약을 가지고 오라는 것인대 그 호렬자 약은 독일사람이 제조한 것이라 효력이 비상한 것이나 결국 한흥근이가 주지 아니함으로 그저 올나왓소. 아모리 효력잇는 약이라도 경성서 원산까지 가질너 갈 필요는 업지 아니하냐? 약은 셰계에서 덕국제 갓치 신효한 것은 업고 더욱

사람의 생명은 가장 귀한 것이라 엇지하야 가질너 가지 아니하겟소. 그때는 경성에 호열자가 대단히 류행를 하야스닛가요. 그런 것이 아니라 최자남에게 부탁하야 한흥근의 집에 두엇든 폭탄을 가저 오란 것이 아니냐? 그리고 뎐보에 아들이 왓다 하는 것은 폭탄이 왓다는 말이 아니냐? 그런 일은 업소. 나는 처음붓터 그런 말은 하지 아니하얏소. 그때 허형이가 원산 나려가서 보닛가 한흥근이가 해삼위로 가서 맛나지 못하고 그 잇흔날 되집허 올나와서 나를 보고 원산 가 결과가 좃치 못한다고 하닛가 너의 말이 가저오지 못하얏드래도 내가 임의 하나 잇스닛가

관계치 안타 하얏느냐? 그런 말은 업소. 허형이에게 왜― 말을 할 리가잇소. 내가 그런 말을 한다 할지라도 허형이가 한편 귀를 드러 주는 것이 안인대 그런 말은 할 리가 잇소? 그 잇흔날 오젼에 명주수건에 싸서 가지고 파나마 모자에 가죽신을 신고 양산과 세수수건을 가지고 남대문 정거쟝에를 갓섯나냐? 그리하얏소. 그날 춍독이 드러오는 날이라 조선귀족과 군인과 기타 사람들이 모혀드는 것을 보고 그날은 정말 총독이 드러오는 줄 알고 귀빈실 츌입구에 기다리고 섯다가

폭발탄 던질 자리를 선택하야 가지고 섯는대 신총독이 귀빈실에서 나와 그의 부인과 함끠 마차에 오르려 할 때에 피고가 일즉이 신문에서 본 사진을 대조하야 보아서 얼골이 춍독과 틀님업슴으로 폭탄을 던지엿느냐? 그리하얏소. 그러면 그에에 그 부근의 형편은 엇더하얏느냐? 춍독의 마차는 나의 선 곳에서 불과 오륙간 되는 곳이엇고 사람은 그다지 만치 못하얏소. 마차가 떠나랴 하는 순간에 마차의 좌우에는 사람이 얼마나 섯섯느냐? 경례하는 사람이라든가 사진반과

신문긔자와 경관이 만히 잇지 안이하얏느냐? 나는 그때에 사실은 자세히 일을 수가 업소. 다만 총독이 마차에 탐을 보고 곳 던지엇슬 뿐이닛가. 춍독이 마차에 탈러에 피고는 올은손으로 폭탄은 내어서 수건으로 가리어 가지고 잇다가 춍독의 가슴을 향하고 던지엇느냐? 그리하얏소. 폭탄을 던질 때에 큰소리와 함끼 연긔가 나며 마차의 압헤 떠러진 것을 모르느냐? 엇지햇던지 나는 폭탄을 던진 후에 일은 모르오. 폭탄이 떠러지며 소리가 나고 폭발이 되야 깨어진 쪼각 한 쪽이 마차에 맛고 또 한 쪽은 마차의 뒤를 뚤코 드러가서

춍독의 검대를 맛치고 부근에 잇던 신문긔쟈 외에 삼십칠인이 중경상을 당한 일을 아느냐? 나는 다만 던지엇스닛가 춍독은 죽엇스리라 하고 하나님께 긔도만 하얏슬 뿐이오. 아모 것도 당시의 일은 모르오. 그러나 나는 츰추며 내가 지은 시를 을푸랴 할 적에 춍독은 죽지 아니하고 마치는 뚤뚤뚤 굴너감을 보고 나는 과연 실망 락담하얏소. 엇지햇던지 춍독은 아니죽엇스나 대판조일신문 득파원 귤향귤(橘香橘) 외에 삼십칠명이 상한 것을 아느냐? 모르오. 사람이 만히 모힌 곳에 폭탄을 던지면 다른 사람이 만히 샹한 줄은 몰낫느냐? 나는 폭탄이라는 것을 말만 듯고 항아리만치나 큰게으로 알앗고

내가 사융한 것은 폭탄이라 하나 끗이 뽀죽함으로 그곳에서 탄환 갓흔 것이 나와서 마즈면 마즌 사람만 죽고 다른 사람에게 위험한 일이 잇는 것은 몰낫소. 그러나 최자남의 말에 폭탄을 던지면 륙혈포 이십사배의 위력으로 백명의 사람을 죽일 만하다 하얏스니 이 말은 네가 한 것이 아이냐? 그 말은 최자남의 말이오. 또 지난번에 법뎡에서 최자남의 진술을 들은즉 역시 자긔도 그런 일이 엄판디고 변명하는 말은 들엇소. 이사는 폭탄을 그런 그림을 강에에게 뵈이며 이것이 네가 그린 것이냐? 그럿소. 그런데

폭탄을 던지고 나서 소동은 이려낫스나 아모도 잡지 아니함으로 쳔쳔히 도라와서 다른 곳으로 다라남보다는 경성에 숨어잇슴이 안젼하리라고 수염을 깍고 숨어잇섯드냐? 일을 결행한 후에 다라나랴고 한 것은 아니오. 총독은 죽지 아니하고 아모도 잡지 아니함으로 내 생각에 하나님이 총독도 불상히 역이시고 나도 죽지말나 하심가하고 아모데로도 다라나지 아니하고 서울에 류하얏소


崔子南(최자남)의 答辯(답변)

폭탄은 아조 모른다고

강우규의 심문이 맛친 후에 판사는 피고 최자남을 이러나라 한다. 이에 최자남의 신문이 시작되니 판사는 기왕에 형벌을 밧은 일이 잇느냐? 업소. 종교는 무엇이냐? 야소교 댱노파요. 로서아디방에 류한 일이 잇느냐? 잇소. 그러면 몃 해나 잇섯스며 무엇을 하얏느냐? 십구년 젼에 들어가서

칠팔년 후에 고향에 나왓다가 다시 륙년 젼에 「니코리스크」에 가서 장사를 하다가 삼 년 젼에 원산으로 나와서 살앗소. 그러면 피고 강우규는 어느 때부터 알앗느냐? 「니코리스크」에서 사년 젼에 강영감이 약을 가지고 왓슬 때에 처음 알앗소. 그러면 네 집에 류한 일이 잇느냐? 한해에 삼사삭식 두해 동안 와서 류하얏소. 그러면 강은 친하냐? 나의 안해의 병을 곳치어 쥰 일이 잇슴으로 나의 안해와는 부녀갓치 지내오. 네가 원산에 와서 사는 줄을 강우규가 알앗느냐? 모름니다. 그러면 작년 륙월 십오일에 피고는

원산 광셕동 길가에서 피고 강우규를 맛낫스며 엇더케 맛낫느냐? 우연히 맛낫소. 내가 집일을 하고 잇느라닛가 강영감이 지나가시기로 나는 오래간만에 깜짝 반기어서 「아―강선생 아니심닛가」하고 나는 뛰어가서 손을 잡고 나의 집으로 도라와서 점심을 대접하고 리약이를 하든 차에 선생이 고향으로 도라가시는 길인데 노자도 부족된다 하기로 그러면 나는 집일에 매우 분주하닛가 나의 안해를 다리고 집안일이나 좀 보살피어 달나고 하얏소. 그후 미구에 상동(上洞)에서 광석동(光石洞)으로 이사를 하얏느냐? 그리하얏소. 동시에 강우규도

갓치 갓스며 몃칠이나 류하얏느냐? 갓치 가서 약 십일간 류련하는 동안에 그 근처 충쳔동이라 하는 곳에 가서 칠팔일 간이나 류하얏소. 그런데 칠월 십일 밤에 강우규가 너를 불너서 내가귀국하기는 독립을 운동하랴고 왓는대 륙혈표 이십사배의 힘과 군중에게 던지면 백명 가량을 살해할 만한 위력이 잇는 폭발탄을 가지고 왓다고 말을 하얏느냐? 안이오. 원산경찰서에서 참지 못할 고문을 당하다가 뭇는대로 정신업시 대답한 것이오. 경성에 와서도 역시 형벌이 무서워서 그럿케 대답하얏스나 그러한 사실은 업소. 강우규가 맛기는

폭탄을 바다 두엇느냐? 그도 역시 고문으로 인하야 그럿케 대답한 것이오, 사실은 업소. 나는 도모지 폭발탄이라고는 알지를 못하오. 그러면 강우규가 네 집에 류하는 동안에 네가 해삼위를 갓다온일이 잇느냐? 외상갑이 수백원 되는 것을 바드러 갓다온 일은 잇소. 그런 게 안이라  강우규의 심바람으로 가지 안이하얏느냐? 안이오 아모 부탁도 밧지 안이 햇소. 해삼위에서 로인단의 신님쟝『信任狀』을 가지고 오지 안이하얏느냐? 갈 젹에 강선생이 그곳에 잇는 강부위『姜副尉』에게 보내는

편지는 뎐햇스나 그 답장은 아니가지고 왓소. 그러면 한흥근(韓興根)을 네가 아느냐? 알으오. 그러면 강우규가 한흥근을 소개하야 폭탄을 사게 하여 달나고 한 일이 잇느냐? 업소. 강우규가 서울 왓슬 때에 『아달이 도착하얏스니 곳 오라』는 뎐보를 네가 노앗느냐? 한흥근의 심바람으로 노흔 일이 잇소. 그러면 그 뎐보가 암호인 것을 네가 알지 못하얏느냐? 몰랏소. 그러면 원산경찰서에서 자살은 웨 하랴 하얏느냐? 그것도

혹독한 형벌에 못이기어서 차라리 긔왕에 죽을 목슴이닛가 얼는 죽겟다고 그리한 것이오. 이럿케 ㅤ댱황한 신문과 서슴업는 답변이 끗난 후에 판사는 증거품 삼십오ㅤ뎜으로 일일히 내여서 피고에게 뵈이다.


寺田(사전) 檢事(검사)의 論告(논고)

구형은 여젼히 사형

다음에 사뎐검사 『寺田檢事』의 댱황한 론고가 잇섯스니 본건은 작년 구월 이일 오후 오시에  재등 춍독이 남대문역에 도착할 때에 폭탄을 던짐의 군중이 모힌 곳일 뿐 안이라 백주에 생긴 일인즉 현저한 사실이라. 범죄를 확실히 구성하얏고 강의 목뎍은 춍독을 살해코자 하얏스나

춍독은 죽지 안이하고 그 부근에 잇던 신문긔쟈 사진반 경관 등 삼십칠인의 중경상자를 내이어서 맛참내 대판조일 특파원 귤향귤 외에 회일명은 죽은지라. 피고 강으규가 폭탄을 던지면 군중에 피해가 잇슬 줄을 몰낫다 함은 다만 구실에 지나지 못함으로 강우규는 살인미수범과 살인긔수범을 범하얏고 최자남은 아모리 폭탄에 대하야는 모른다 하나 경찰검사 예심을 것처서 뎨일심에서 진슬한 바가 공통됨을 보면 피고의 진술은 다만 구실에 지나지 못함으로 역시방조범으로 볼 수가 잇다는 뜻으로 댱황황한 론고가 잇슨 후에

사형 피고 강우규

증역 삼 년 피고 최 자 남이라는 구형을 뎨일심과 갓치 하얏다


松本氏(송본씨) 長辯論(장변론)

강우규의 살인의지는
어느때 결뎡한지 의문

검사가 여젼 뎨일심과 갓치 강우규는 사형으로 최자남은 증역 삼 년으로 구형올 한 후에 최자남의 변호사 송복정관(松本正寬)씨가 열렬한 변호를 시작하니 먼저 강우규와 최자남이 공모라하면 강우규가 최자남에게 누구를 죽이자는 말을 하얏슬 것이어늘 오날날까지 경찰 검사 예심、뎨일심 등의 모든 긔록을 보아도 그러한 말업고

가령 공모라 하던지 방조라 할지라도 살인에 대한 공모라던지 방조라 할 수는 업스니 웨 그러냐 하면 먼적 강우규가 살인할 뜻을 어느 때에 결뎡한 것이 의문이다. 폭탄을 가지고 단이는 사람이 믈른 살인할 생각이야 잇지만은 어느 때에 누구를 죽이겟다는 결심이 생기기 전에는 결단코 법률에 살인의지를 구성치 못하는 것인대 강우규가 살인을 결심한 때는 해삼위에 잇슬 때인지 혹은 경성에 올나와선지 어느 때에 결심한 지를 도모지 모르는 일이오. 최자남이가 원산경찰서에서 자살하랴 함은 피고이 정신상에 무쌍한 고통이 잇슴은 명백이 말함이니 이는 여간한 일로써 자살을 할 수 업슴이라. 자긔가 고통에 못이기로 사실로 공모를 하얏는지 아니하얏는지는 그만두고라도 강우규의 사건으로 피착되얏슨즉 살어나아갈 수는 업스리라는 무한한 고통을 밧다가 그리된 것이라고 불갓혼 변호의 혀를 약 오십분간이나 했다.

午後(오후) 六時(육시) 閉廷(폐정)

무사히 심리 종결

이와갓치 강우규의 공소은 지리하게 오후 열시에야 끗나매 강우규는 먼저 마차에 실어서 번개갓치 보내고 최자남은 따로히 보낸 후에 방텽 나가게 하얏슴으로 당일은 아모도 업시 무사히 지낫더라


강우규 공소공판


검사의 구형은 역시 사형
강우규는 끝까지 태연해
(전날 지면에 이어 계속)

결행하던 순간
총독이 죽지 않은 것만 분하고
나머지는 도무지 모른다


(문)그 다음 31일 아침에 안국동 19번지 윤이식의 집에 가서 피고 허형에게 아들 감용이가 도착하였다는 전보가 왔던 말을 들었나?

(답)그렇소.

(문)아들이 왔으면 올라올 것인데 왜 전보를 보냈는가?

(답)아들이 아니라 내 조카로 20여 년 전에 집을 나간 뒤 들어온 것인데 전보만 보내고 나는 보지 않아도 상관이 없어서 전보만 보내고 고향 덕원으로 갔던 것이오.

(문)허형을 불러서 원산으로 아들을 데리고 오라고 보냈는가?

(답)그런 것이 아니라 편지를 써줘 한흥근의 집에서 콜레라 약을 가지고 오라고 했는데 그 콜레라 약은 독일사람이 제조한 것으로 효력이 매우 좋지만 결국 한흥근이 주지 않아 빈손으로 올라왔소.

(문)아무리 효력이 있는 약이라도 경성에서 원산까지 가지러 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답)약은 세계에서 독일제같이 신통한 것은 없고 더구나 사람의 생명은 가장 귀한 것이오. 어떻게 가지러 가지 않을 일이겠소. 그때는 경성에 콜레라가 크게 유행하였으니까요.

(문)그런 말이 아니라 최자남에게 부탁하여 한흥근의 집에 두었던 폭탄을 가져오라고 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전보에 아들이 왔다 하는 것은 폭탄이 왔다는 말이 아니냐?

(답)그런 일은 없소. 나는 처음부터 그런 말은 하지 아니하였소.

(문)그때 허형이가 원산 내려가서 보니까 한흥근이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만나지 못하고 그 이튿날 되짚어 올라와서 피고를 보고 원산 간 결과가 좋지 못하다고 하니까 피고의 말이 가져오지 못하였더라도 내가 이미 하나 있으니까 상관없다고 하였는가?

(답)그런 말은 하지 않았소. 허형이에게 말을 할 리가 있소? 내가 그런 말을 한다 해도 허형이가 한쪽 귀로도 들어주는 것이 아닌데 그런 말을 할 리가 있소?

(문)그 이튿날 오전에 (폭탄을) 명주수건에 싸가지고 파나마모자에 가죽신을 신고 양산과 세수 수건을 가지고 남대문 정거장에 갔었는가?

(답)그리하였소.

(문)그날은 총독이 들어오는 날이라 조선귀족과 군인과 기타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을 보고 그날은 정말 총독이 들어오는 줄 알고 귀빈실 출입구에 기다리고 섰다가 폭탄 던질 자리를 선택하여 가지고 서있는데 신임 총독이 귀빈실에서 나와 그의 부인과 함께 마차에 오르려 할 때에 피고가 일찍이 신문에서 본 사진을 대조하여 보아서 얼굴이 총독과 틀림없으므로 폭탄을 던졌는가?

(답)그렇게 하였소.

(문)그러면 그 외에 그 부근의 상황은 어떠하였는가?

(답)총독의 마차는 내가 섰던 곳에서 불과 9, 10m 떨어진 곳이었고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소.

(문)마차가 떠나려 하는 순간에 마차의 좌우에는 사람이 얼마나 서 있었는가? 경례하는 사람이라든가 사진기자와 신문기자와 경찰이 많이 있지 않았는가?

(답)나는 그때 사실은 자세히 알 수가 없었소. 다만 총독이 마차에 타는 것을 보고 곧 (폭탄을) 던졌을 뿐이니까.

(문)총독이 마차에 탈 때에 피고는 오른손으로 폭탄을 꺼내서 수건으로 가려 가지고 있다가 총독의 가슴을 향하여 던졌는가?

(답)그렇게 하였소.

(문)폭탄을 던질 때에 큰소리와 함께 연기가 나며 마차 앞에 떨어진 것을 몰랐는가?

(답)어찌됐든지 나는 폭탄을 던진 뒤의 일은 모르오.

(문)폭탄이 떨어지며 소리가 나고 폭발되어 깨진 조각 한쪽이 마차에 맞고 또 한쪽은 마차 뒤를 뚫고 들어가서 총독의 검대(劍帶)를 맞히고 부근에 있던 신문기자 외에 37명이 중경상을 당한 일을 아는가?

(답)나는 다만 던졌으니까 총독은 죽었으리라 여기고 하나님께 기도만 하였을 뿐이오. 당시의 일은 아무 것도 모르오. 그러나 나는 춤추며 내가 지은 시를 읊으려 할 때에 총독은 죽지 않고 마차는 뚤뚤뚤 굴러가는 것을 보고 나는 과연 실망, 낙담하였소.

(문)어찌됐든지 총독은 죽지 않았으나 오사카아사히신문 다치바나 고기쓰 특파원 외에 37명이 부상당한 것을 아는가?

(답)모르오.

(문)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 폭탄을 던지면 다른 사람이 많이 부상할 줄 몰랐는가?

(답)나는 폭탄이라는 것을 말만 듣고 항아리만큼 큰 것으로 알았소. 내가 사용한 것은 폭탄이라고 하지만 끝이 뾰족해 그곳에서 탄환 같은 것이 나와서 맞으면 맞은 사람만 죽지 다른 사람에게 위험한 일이 생기는 것은 몰랐소.

(문)그러나 최자남의 말에 폭탄을 던지면 권총의 24배 위력으로 100명의 사람을 죽일 만하다 하였으니 이 말은 피고가 한 것이 아닌가?

(답)그 말은 최자남의 말이오. 또 지난번에 법정에서 최자남의 진술을 들으니까 역시 자기도 그런 일이 없다고 변명하는 말은 들었소.

(문)이사는 폭탄을 그린 그림을 피고에게 보여주며 이것이 피고가 그린 것인가?

(답)그렇소.

(문)그런데 폭탄을 던지고 나서 소동은 일어났지만 아무도 잡지 않으니까 천천히 돌아와서 다른 곳으로 도주하기보다는 경성에 숨어있는 것이 안전할 것이라고 여기고 수염을 깎고 숨어 있었는가?

(답)일을 결행한 후에 달아나려고 한 것은 아니오. 총독은 죽지 않고 아무도 잡지 않으니까 내 생각에 하나님이 총독도 불쌍히 여기시고 나도 죽지 말라 하심인가 하고 어느 곳으로도 도망가지 않고 서울에 머물렀소.


최자남의 답변

폭탄은 전혀 모른다고

강우규의 신문이 끝난 뒤에 판사는 피고 최자남을 일어나라고 한다. 이에 최자남의 신문이 시작되니 판사는

(문)과거에 형벌을 받은 일이 있느냐?

(답)없소.

(문)종교는 무엇인가?

(답)예수교 장로파요.

(문)러시아지방에 머문 일이 있는가?

(답)있소.

(문)그러면 몇 년 간 있었고 무슨 일을 했는가?

(답)19년 전에 들어가서 7, 8년 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6년 전에 ‘니콜리스크’에 가서 장사를 하다가 3년 전에 원산으로 와서 살았소.

(문)그러면 강우규는 언제부터 알았는가?

(답)‘니콜리스크’에서 4년 전에 강 영감이 약을 가지고 왔을 때 처음 알았소.

(문)그러면 너의 집에 머문 일이 있는가?

(답)한 해에 3, 4개월씩 2년 동안 와서 머물렀소.

(문)그러면 강우규와 친한가?

(답)내 아내의 병을 고쳐준 일이 있어서 내 아내와는 부녀같이 지내오.

(문)네가 원산에 와서 사는 것을 강우규가 알았는가?

(답)모르오.

(문)그러면 작년 6월 15일에 피고는 원산 광석동 길가에서 강우규를 만났는데 어떻게 만났는가?

(답)우연히 만났소. 내가 집일을 하고 있느라니까 강 영감이 지나가시기에 나는 오래간만에 깜짝 반가워서 ‘아··· 강 선생 아니십니까?’ 하고 뛰어가서 손을 잡고 내 집으로 돌아와서 점심을 대접하고 이야기를 하던 차에 선생이 고향으로 돌아가시는 길인데 노자도 부족하다 하기에 그러면 나는 집일을 하느라 매우 바쁘니까 내 아내를 데리고 집안일이나 좀 보살펴 달라고 하였소.

(문)그 후 멀지 않아 상동에서 광석동으로 이사를 갔는가?

(답)그렇게 하였소.

(문)동시에 강우규도 같이 갔으며 며칠이나 머물렀는가?

(답)같이 가서 약 10일간 머무는 동안에 그 근처 충천동이라고 하는 곳에 가서 7, 8일간 머물렀소.

(문)그런데 7월 10일 밤에 강우규가 피고를 불러서 내가 귀국하려는 것은 독립운동을 하려는 것인데 권총 24배의 힘과 군중에게 던지면 100명가량을 살해할 만한 위력이 있는 폭탄을 가지고 왔다는 말을 하였는가?

(답)아니오. 원산경찰서에서 참지 못할 고문을 당하다가 묻는 대로 정신없이 대답한 것이오. 경성에 와서도 역시 형벌이 무서워서 그렇게 대답하였으나 그런 사실은 없소.

(문)강우규가 맡기는 폭탄을 받아 두었는가?

(답)그 역시 고문으로 인해 그렇다고 대답한 것이오. 사실은 없소. 나는 도무지 폭탄이라고는 알지를 못하오.

(문)그러면 강우규가 너의 집에 머무는 동안에 네가 블라디보스토크를 갔다 온 일이 있는가?

(답)외상값이 수백 원 되는 것을 받으려 갔다 온 일은 있소.

(문)그런 것이 아니라 강우규의 심부름으로 가지 않았는가?

(답)아니오. 아무 부탁도 받지 않았었소.

(문)블라디보스토크에서 노인단의 신임장을 가지고 오지 않았는가?

(답)갈 때에 강 선생이 그곳에 있는 강부위에게 보내는 편지는 전했지만 그 답장은 가지고 오지 않았소.

(문)그러면 강우규가 한흥근을 소개하여 폭탄을 사게 하여 달라고 한 일이 있는가?

(답)없소.

(문)강우규가 서울에 왔을 때 “아들이 도착하였으니 곧 오라”는 전보를 네가 보냈는가?

(답)한흥근의 심부름으로 보낸 일이 있소.

(문)그러면 그 전보가 암호인 것을 네가 알지 못했는가?

(답)몰랐소.

(문)그러면 원산경찰서에서 왜 자살은 하려고 하였는가?

(답)그것도 혹독한 형벌을 이기지 못해서 차라리 기왕에 죽을 목숨이니까 얼른 죽겠다고 그렇게 한 것이오.

이렇게 장황한 신문과 서슴없는 답변이 끝난 뒤에 판사는 증거품 35점을 일일이 집어서 피고에게 보였다.


데라다 검사의 논고

구형은 여전히 사형

다음에 데라다 검사의 장황한 논고가 있었다. 본건은 작년 9월 2일 오후 5시에 사이토 총독이 남대문역에 도착할 때에 폭탄을 던진 것이 군중이 모인 곳일 뿐 아니라 대낮에 생긴 일이므로 분명한 사실이다. 범죄를 확실히 구성하였고 강우규의 목적은 총독을 살해하고자 하였으나 총독은 죽지 않고 그 부근에 있던 신문기자 사진기자 경찰 등 37명의 중경상자를 발생시켰다. 결국 다치바나 고기쓰 외에 1명은 숨졌다. 피고 강우규가 폭탄을 던지면 군중에 피해가 있을 줄 몰랐다고 하는 것은 다만 변명에 지나지 못하므로 강우규는 살인미수범과 살인기수범을 저질렀고 최자남은 아무리 폭탄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하지만 경찰 검사 예심을 거쳐서 제1심에서 진술한 내용이 공통된 것을 보면 피고의 진술은 다만 구실에 지나지 못하므로 역시 방조범으로 볼 수가 있다는 뜻으로 장황한 논고를 한 뒤에

사형 피고 강우규, 징역 3년 피고 최자남이라는 구형을 제1심과 같이 내렸다.


마쓰모토 변호사의 긴 변론

강우규의 살인의지는
언제 결심했는지 의문

검사가 여전히 제1심과 같이 강우규는 사형으로, 최자남은 징역 3년으로 구형한 뒤에 최자남의 변호사 마쓰모토 마사히로 씨가 열렬한 변호를 시작했다. 먼저 강우규와 최자남이 공모했다고 하면 강우규가 최자남에게 누구를 죽이자는 말을 하였을 것인데 오늘날까지 경찰 검사 예심 제1심 등의 모든 기록을 보아도 그런 말이 없고

가령 공모라고 하든지 방조라고 할지라도 살인에 대한 공모라든지 방조라고 할 수는 없다. 왜 그러냐 하면 먼저 강우규가 살인할 뜻을 언제 결정한 것이 의문이다. 폭탄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물론 살인할 생각이야 있지만 언제 누구를 죽이겠다는 결심이 생기기 전에는 결코 법률에 살인의지를 구성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강우규가 살인을 결심한 때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을 때인지 또는 경성에 올라와서인지 언제 결심했는지를 도무지 모르는 일이다.

최자남이 원산경찰서에서 자살하려고 한 것은 피고가 정신적으로 과거에 견줄 수 없는 고통이 있었다는 점을 명백하게 말하는 것이므로 이는 여간한 일로써는 자살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가 고통을 이기지 못해서 실제로 공모를 하였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그만두고라도 강우규의 사건으로 붙잡혔으므로 살아 나갈 수는 없겠다는 한없는 고통을 받다가 그렇게 된 것이라고 불을 토하는 듯한 변호를 약 50분간이나 하였다.


오후 6시 폐정

무사히 심리 종결

이와 같이 강우규의 공소는 지루하게 오후 6시에 끝이 나 강우규는 먼저 마차에 태워 번개같이 보내고 최자남은 따로 보낸 뒤에 방청객을 나가게 하였으므로 이날에는 아무 일도 없이 무사히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