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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민정음’ 빌보드 정복[횡설수설/이진영]

입력 | 2020-12-02 03:00:00


올 초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받은 작품상은 1992년 아카데미 역사상 비(非)영어 영화로는 처음이었다. 그만큼 미국인들은 ‘자막 달린 영화’를 싫어한다. 어제는 방탄소년단(BTS)이 ‘Life Goes On’으로 빌보드 ‘핫100’ 1위를 차지했다. 제목은 영어지만 가사는 한국어다. 올 9월 영어 가사 곡 ‘Dynamite’가 싱글차트 1위를 차지한 데 이어 이번엔 한국어 가사로 정상에 오른 것이다. 영어 가사가 아닌 노래가 발매 첫 주에 정상에 오른 것은 빌보드 62년 역사상 처음이다.

▷BTS의 충성스러운 ‘아미(ARMY)’들에게 언어는 장벽도 아니다. 유튜브에는 BTS 한국어 가사 발음을 로마자로 표기하고 영어 자막을 달아놓은 동영상이 차고 넘친다. 아미들 중 ‘통역병’들이 무료로 제작한 콘텐츠들이다. ‘oppa’(오빠) ‘unnie’(언니) ‘aegyo’(애교)와 같은 ‘돌민정음’(아이돌과 훈민정음을 합한 신조어)을 일찌감치 뗀 아미들은 이 영상으로 노랫말을 ‘선행학습’한 후 콘서트장에서 ‘얼쑤’와 같은 추임새까지 ‘떼창’ 한다.

▷BTS의 일상을 담은 영상이나 인터뷰도 공개된 지 몇 시간 만에 영어로 번역되고, 다시 수십 개의 언어로 옮겨진다. BTS가 곤룡포를 입고 나오면 ‘곤룡포란 왕의 의상으로 다섯 마리 용이…’라는 설명이 따른다. ‘우린 다 개돼지 화나서 개 되지’(‘AM I Wrong’)를 번역할 땐 ‘한국 고위 관료가 민중은 개돼지라고 말해 논란이 된 적이 있다’는 해석을 곁들여준다.

▷한류 드라마도 2000년대 초중반까지는 영어 자막이 먼저 제작되고 그것이 각국의 언어로 번역됐는데 그 후로는 바로 각국의 언어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자막 봉사자들은 대부분 대학생들이어서 북반구 대학의 시험 기간엔 자막 달기 속도가 늦어지기도 한다(홍석경 서울대 교수 저서 ‘BTS 길 위에서’). 열성 팬들의 번역에 의지해 ‘어둠의 경로’로 한국 드라마를 찾아보던 팬들은 이제 넷플릭스에서 한류 콘텐츠를 마음껏 포식한다. 대만과 말레이시아의 넷플릭스 최고 인기 TV 프로그램 10편 중 9편, 베트남은 8편, 일본은 5편이 한국 드라마다.

▷지난해 한국어능력시험(TOPIK) 응시자 수는 37만5871명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프랑스 파리8대학 한국어과는 138명 정원에 1000명 넘게 지원했다(2018학년도). 태국과 아르메니아 시위 현장엔 케이팝 노랫말과 한글 구호가 등장한다. 574년 전 ‘말과 글이 달라 제 뜻을 능히 펼치지 못하는 백성’들이 안타까워 만든 한글이 디지털 시대 세계인을 위로하는 문화언어가 되고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