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미놀 시약과 유전자 기술
도둑이 물건을 훔치다 실수로 침대 모서리에 손을 부딪쳐 피가 나면서 침대 이불에 묻었다. 당황한 범인은 핏자국을 숨길 방법을 찾다 책상 위에 있는 잉크를 덧칠했다. 더 완벽하게 숨기기 위해 같은 모양과 크기로 핏자국 옆에 잉크 얼룩을 하나 더 칠하고 도망갔다.
과연 잉크로 감춰진 핏자국을 찾을 수 있을까? 핏자국 위에 칠해진 얼룩과 잉크만 칠해진 얼룩에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림 1〉 잉크에 가려진 흔적
〈그림 2〉 루미놀 반응 결과
오른쪽 맨 위 막대그래프는 범인의 DNA 분석 결과. 그 아래로 A, B, C 3명의 DNA 분석 결과가 그래프로 표시되어 있는데 범인의 그래프와 똑같은 패턴을 보인 그래프의 당사자인 A가 범인.
사람의 혈액에는 적혈구와 백혈구라는 세포가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적혈구에는 헤모글로빈이 있어 우리 몸에 산소를 공급해요. 그러나 적혈구에는 핵이 없어 DNA감식은 불가능합니다. 백혈구는 병원균과 싸워 우리 몸을 방어하는데, 핵을 가지고 있어요. 핵 속에는 엄마와 아빠에게서 물려받은 23쌍의 염색체가 있어요. 염색체는 DNA라고 하는 물질로 만들어지는데, 일란성 쌍둥이를 제외하면 사람마다 고유한 DNA을 갖고 있기 때문에 DNA감식을 하면 누구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혈액, 침, 모발 등 우리 몸 모든 세포의 DNA는 똑같고, 돌연변이가 없으면 변하지 않기 때문에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방법 중 하나입니다. DNA감식 기술은 아주 많이 발달되어 지금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사용하고 있는 기술로 범죄 현장에 있는 핏자국이나 머리카락에서 검출한 DNA와 범인이 일치할 확률은 60억분의 1이 되고 있습니다. 즉 세계 인구 중에 한 명과 일치하는 정도이니 범죄 현장의 핏자국에서 누군가의 DNA가 검출되었다면 그가 범인인 것이 확실하겠지요? 또 ng(나노그램·1ng은 10억분의 1g)에 해당하는 극미량의 핏자국만 있어도 DNA를 분석할 수 있어 범죄 수사에 가장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흔적 A를 채취해 DNA를 감식하겠습니다. 먼저 핏자국에 있는 불순물질을 제거하고 DNA만 깨끗하게 정제한 다음 짧은 길이의 염기서열을 수십만 배 집중적으로 복제하는 증폭반응(PCR)을 하고, 이어 전기영동이란 방법을 거쳐 DNA를 분리합니다.
드디어 <그림 3>에서 보는 것처럼 DNA형이 확인되었네요. 이 결과를 용의자 A, B, C 씨의 구강세포를 채취하여 DNA감식을 한 결과와 비교해 보니 용의자 A 씨와 일치하네요. DNA감식이 참 신기하지요? DNA형이 확인되면 용의자가 있을 때는 이렇게 비교하여 DNA형이 일치하는지를 판정하고, 용의자가 없을 때는 범죄자들의 DNA은행에서 서로 일치되는 사람이 있는지를 검색하며 범인을 찾으니 정말 굉장하지요?
DNA감식 기술은 지금도 계속 발전하고 있어요. 사건 현장에서 1시간 만에 DNA형을 알아낼 수 있는 휴대용 장비도 개발되었고, 머지않은 미래에는 DNA감식을 통해 범인의 얼굴을 그릴 수도 있을 거예요. 공상과학 영화 속에나 볼 수 있었던 장면들이 이루어질 수 있다니 DNA감식은 정말 대단한 것 같죠?
정희선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