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종양 딛고 집필활동 여념없는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심경호 고려대 교수가 달팽이의 뿔처럼 좁다고 ‘와각서실’이라 부르는 자신의 연구실에 섰다. 무더위 속에 10여 권의 책을 동시에 쓰고 있는 그는 “정약용에 대한 논문을 쓰려면 정약용만큼 많이 읽어야 하고, 김시습 평전을 쓰려면 김시습만큼 불교를 공부해야 하는데, 내 공부가 부족하니 결과물은 늘 불만스럽다”고 말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 5일 오후 다시 연구실을 찾았을 때도 똑같은 모습이었다. 건물에 중앙 냉방 에어컨이 가동되지만 이 방엔 책이 워낙 많이 쌓여 있어 공기 순환이 안 돼 냉방 효과가 거의 없단다. 심 교수는 “작고 누추하지만 이 방에서만큼은 내가 주인이고, 이 책들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모두 내 친구다”라며 웃는다.
여름방학인 요즘 심 교수는 휴가도 가지 않고 연구실에서 책 10여 권을 동시에 쓰고 있다. 지금까지 그가 출간한 단독 저서는 29권, 번역서는 40권에 이른다. 그는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시절 통학버스에서 책을 보던 습관 때문에 오른쪽 눈의 망막이 손상돼 30여 년간 한쪽 눈으로 책을 봐왔다. 2년 전에는 뇌종양 수술을 두 차례 받고 오른쪽 귀가 안 들리기 시작했다. 쉬엄쉬엄 해도 될 법한데 외려 그의 연구는 더 왕성해지고 있다.
“의사가 수술이 조금만 늦었으면 죽었을 거래요. 이젠 덤으로 살고 있다는 생각에 모든 게 즐겁지요. 다행히 수술 후에도 기억력이나 사고력은 명확해서 연구에 불편함이 없어요. 아침마다 맑은 정신으로 일어나 할 일이 많다는 게 얼마나 기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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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최근에는 안평대군 평전을 쓰고 있다. 세종의 셋째 아들로 서예와 시문, 그림, 가야금에 뛰어났던 안평대군은 계유정난 이후 강화도로 유배됐다가 36세에 둘째 형 수양대군에게 죽음을 당했다. “정치와 예술 사이에서 파멸해간 안평대군의 삶을 제대로 써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려면 제가 안평대군으로 빙의해야 하는데 왕자 같은 삶을 살아보질 않아 영 어렵네요. 하하. 강화도에 가서 안평대군의 죽기 직전 심정을 연상해봐야겠습니다.”
이 밖에도 그는 역사 속 인물들의 호(號)에 담긴 뜻을 풀어낸 책, 한국의 문화사로 읽는 천자문 이야기, 중국 한시에 대한 감상을 담은 책도 쓰고 있다. 이토록 왕성한 집필에 매달리는 이유를 그는 “우리 세대의 의무감”이라고 표현했다. 충북 음성의 가난한 집 육남매 중 맏이로 태어난 그는 소설가의 꿈을 포기하고 학자의 길을 택했다. “우리 세대는 가정과 사회에 대한 의무감에서 자유롭지 못해요. 내가 하는 일이 뭔가 의미 있고 남들에게 도움이 돼야 한다는 강박에 버릇처럼 공부하고 책을 쓰는 것이죠.”
그는 스스로 “두껍고 팔리지 않는 책을 내기로 유명하다”고 말한다. 돈 되는 책은 아니지만 인문학의 기초연구를 해놔야 “후학들이 거인의 어깨 위에 서서 멀리 바라볼 수 있을 것”이란다. 자가용이 없는 그는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자택에서 연구실까지 20분씩 걸어서 출퇴근한다. 그의 손에 들린 헝겊 책가방이 신나게 춤춘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