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증 거쳐 2년 전 서울 석촌호수로 이사온 부끄러운 역사… 문화해설사 2명 상주하게 된 사연
《 서울 송파구 잠실동 석촌호수 초입에 있는 삼전도비(三田渡碑)는 원래 이름이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다. 병자호란 때 청 태종에 무릎을 꿇고 항복한 인조가 청의 요구에 따라 1639년 청 태종의 ‘공덕’을 기리는 비를 세운 것이다. 이 비석의 곁에는 전속 문화유적해설사 2명이 상주한다. 한국인의 사랑을 받는 유적도 아닌 데다 주변에 다른 유적도 없는데 이렇게 각별한 대접을 받는 것은 이례적이다. 삼전도비가 이처럼 ‘특별 경호’를 받는 데는 남다른 사연이 있었다. 온몸에 만주어와 몽골어, 한자를 새긴 삼전도비를 한참 들여다보니 유독 곡절이 많았던 이 비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다. 》
높이 395cm, 너비 140cm인 삼전도비는 굴곡진 삶을 반영하듯 비문에 새겨진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바스러졌다. 일각에선 당시 조선인들이 일부러 비의 몸체 부위를 무른 대리석으로 고른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이후 나에 대한 경비가 강화됐다. 해설사를 보내는 곳은 송파노인종합복지관이다. 송파구도 내 안전이 걱정됐던지 복지관에 “반드시 문화해설사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24시간 내내 나를 감시하는 폐쇄회로(CC)TV도 설치됐다.
2007년 삼전도비가 훼손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30대 남자인 범인은 비 앞뒷면에 각각 ‘철’과 ‘거’, ‘370’(인조가 항복한 지 370년이 지났다는 의미) ‘병자’를 나눠 썼다. 동아일보DB
내 인생은 처음부터 굴욕이었다. 인조는 신하들에게 내 몸에 새길 문장을 짓도록 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도승지이자 예문관제학이던 이경석(1595∼1671)이 결국 총대를 메고 문장을 지었는데 “문자를 배운 것이 후회되고 부끄럽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글씨를 쓴 오준(1587∼1666)은 자신의 오른손을 돌로 찍으며 자책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얘기를 듣고 있으면 내 몸에 새겨진 만주어와 몽골어 글자가 ‘조폭’ 등짝에 새겨진 문신같이 징그럽게 느껴진다.
청나라의 힘이 전 같지 않던 1895년 고종 황제는 나를 보기 싫다고 아예 강에 처박아 버렸다. 날 건져 올려 다시 세운 건 일제강점기인 1913년 일본인들이었다. 조선의 치욕을 일부러 세상에 드러내고 싶었던 게다. 그때 난 ‘차라리 강에 처박혀 있는 게 낫겠다’란 생각을 했다. 내 맘을 읽었는지 1945년 광복이 되자 이 지역 주민들이 날 아예 땅속에 묻어 버렸다. 그리고 1963년 대홍수 때 다시 드러났다. 18년간 땅속에 묻혀 있느라 나는 6·25도, 4·19도, 5·16도 일어난 줄 모르고 지나갔다.
난 만신창이의 몸으로 1963년 사적 제101호가 됐다. 패배와 치욕의 역사를 그대로 남겨 후세에 교훈이 되게 하겠다는 뜻이었다. 이제 고생 끝인가 했는데, 사람들은 “왜 삼전도비가 문화재냐”라며 들고 일어났다. 큰길을 내거나 재개발을 할 때마다 난 송파구 곳곳을 전전해야 했다. ‘이깟 치욕스러운 돌덩이 때문에 개발에 차질을 빚을 수 있느냐’는 게 주민들 생각이었다. 고증 끝에 2010년에야 원래 자리인 이곳으로 올 수 있었다.
내 나이 373세. 짧지 않은 생이다. 물에 빠지고 땅에 묻혔지만 결국 살아남았다. 더이상 내 몸에 손대는 건 싫다. 날 그저 생긴 그대로 놔두고 보러 오길 바란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세상 바뀌는 줄도 모르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던 조상들이 어떤 역사를 겪었는지 돌아보며 정신 차리는 기회로 삼길 바란다. 닷새 뒤면 치욕의 역사를 마감했던 8·15 아닌가.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