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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총선자금' 정치적 악용말라

입력 | 2001-01-05 18:42:00


96년 4·11총선을 앞두고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당시 여당이던 신한국당에 엄청난 규모의 선거자금을 지원한 사실이 검찰 수사로 드러났다. 아직 전모가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액수가 1000억원이 넘고 대부분 ‘통치자금’ 명목의 안기부 예산을 전용한 것이라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국가정보기관이 국민이 낸 세금을 특정 정당의 선거자금으로 지원했다는 것은 국기(國基)문란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두말할 것도 없이 철저한 수사가 이뤄져야 한다. 검찰도 현재의 야당 의원들이 관련된 민감한 사건이라는 점을 의식해 “정치상황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며 엄정한 수사를 다짐하고 있다.

그런 터에 민주당 김중권(金重權)대표가 마치 검찰의 수사 내용을 이미 파악한 것처럼 얘기한 것은 여당 대표로서의 자격은 물론 판사 출신인 그의 양식을 의심케 하는 일이다. 그는 기자들에게 “검찰에서 직접 들은 것은 아니지만 안기부 돈을 받은 사람들의 리스트도 확인됐다는 말을 들었다”며 “신한국당 선거대책위의장이던 이회창(李會昌)한나라당 총재도 당시 자금의 흐름을 알고는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대표는 검찰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에서 명단에 대해 얘기를 들었는가. 정치적으로 미묘한 시기에 불쑥 이런 말을 던진 이유는 무엇인가. 혹시 수사범위를 암시해 야당을 압박함으로써 대치정국을 풀어보자는 계산이 깔려있는 것은 아닌가. 확인된 명단이 있다면 떳떳하게 밝힐 일이지 무책임하게 말을 흘려 의혹을 증폭시킨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김대표의 말이 검찰에 대한 국민의 불신으로 이어질 것이란 점이다. 김대표가 검찰에서 직접 들은 것은 아니라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김대표의 말은 결국 검찰이 수사진행 상황을 어디엔가 보고하고 있고 김대표는 이를 전해들었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검찰이 여권과 수사범위 등을 조율하고 있다는 의심을 살 수도 있다. 다름 아닌 여당 대표가 그 같은 빌미를 제공했다.

이 사건 수사를 야당 탄압이라고 몰아붙이는 한나라당의 태도도 옳지 않다.

검찰은 계좌추적을 통해 위법사실이 드러난 이상 여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정하게 관련자를 가려내 처벌하는 게 마땅하다. 검찰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치권의 주장이나 암시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