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는 국제정세와 전략문제에 관해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영국의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와의 독점계약으로 IISS의 간행물 전략문제논평(Strategic Comments)중 ‘접근자세의 변화가 요구되는 동남아국가연합(ASEAN)’을 요약, 소개한다.》 브루나이 인도네시아 라오스 말레이시아 미얀마 필리핀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 등 9개국으로 이뤄진 동남아국가연합(ASEAN)이 지난해 8월 창설 30주년을 맞았다. 97년 한해는 ASEAN에 당연히 축제의 해가 됐어야 한다. 캄보디아의 가입이 성사돼 ‘ASEAN 10’을 실현할 수 있었다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회원국이 안고 있는 각종 문제에 대한 ASEAN의 대응방식이 승리를 거뒀다는 평가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즉 점진주의적이고 합의에 바탕을 두며 회원국간의 차이를 관대하게 인정하는 태도를 말한다. 그러나 지난해 세가지 사건이 ASEAN의 축제를 산산조각냈고 회원국의 내정 불간섭이라는 원칙이 재검토 대상에 올랐다. 첫째는 지난해 7월 발생한 훈 센 캄보디아 총리의 쿠데타, 둘째는 인도네시아의 삼림화재로 인한 환경재앙, 마지막은 동남아의 경제위기다. 캄보디아 쿠데타에 대해 ASEAN은 캄보디아의 ASEAN 가입 연기 외에 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ASEAN은 불개입 정책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했다. 이에 대해 훈 센총리는 ASEAN의 의사결정에 일관성이 없다고 반발했다. 그는 미얀마 군부가 88년 정권을 탈취하고 90년 선거결과를 뒤집는 결정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미얀마의 가입이 추진됐다고 지적했다. 또 인도네시아의 선거폭력, 태국의 선거부정, 라오스 베트남의 일당독재를 거론했다. ASEAN이 회원국의 결함 많은 정치체제를 관대하게 인정해왔으면서 캄보디아만 별스런 취급을 하고 있다고 훈 센은 비난했다. 이에 대해 ASEAN은 76년 체결된 동남아시아 우호협력조약(TACSEA)이 정정불안지역의 평화로운 권력이양을 규정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지난해 가을 브루나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태국 남부를 뒤덮은 연무도 ASEAN의 문제의식을 깊게 하는 계기가 됐다. 연무는 보르네오와 수마트라섬의 농민들이 야자유와 펄프 생산을 위해 숲에 불을 지르면서 시작됐다. 인도네시아는 이같은 불법행위를 단속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지난해 7월 태국에서 시작된 외환외기는 빠른 속도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주변국으로 번져갔다. 아시아 국가들은 국제통화기금(IMF)에 의존해야 했다. 그러나 마하티르 모하메드 말레이시아총리는 금융위기가 환투기꾼과 유태인 등이 아시아 경제의 성공을 흠집내기 위해 꾸민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경제개혁을 요구하는 IMF에 반감을 표시했다.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자국의 유동성과 지불능력의 위기를 부정하는 듯한 발언으로 동남아 화폐와 주식의 폭락을 부추겼다. 아시아 또는 ASEAN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기금창설이 논의됐지만 일본의 소극적 태도로 좌초했다. 결국 ASEAN은 아시아개발은행(ADB)이 주도하는 지역감시체제의 확립에 합의했다. 이 감독체제는 회원국들의 거시경제정책을 조정하고 압력을 행사하게 된다. 인도네시아의 상황은 각국의 개입을 촉발했고 수하르토는 결국 경제개혁에 동의했다. 인도네시아의 불안은 동남아 국가들을 긴장시켰다. 특히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는 인도네시아에서 수백만명이 탈출하는 사태가 빚어지고 자국에 심각한 악영향을 줄 것을 염려하고 있다. 불개입 정책은 유용하고 본질적인 ASEAN의 지도이념이었다. 〈정리〓고진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