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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話 문민정부⑮]이원조씨 극비 日도피 배경

입력 | 1998-02-10 20:13:00


문민정부의 사정이 개시되고 열흘 정도가 지난 93년 5월초. 집권세력과 검찰 수뇌부, 수사검사 사이에는 미묘한 갈등국면이 조성되고 있었다. 갈등의 원인은 바로 이원조(李源祚)의원 처리문제. 가장 공세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은 이씨 자신이었다. “내가 잘못되면 대선자금 비밀을 모두 까발리겠다”는 그의 협박전화가 먹혀들기 시작했다. 집권세력과 검찰 수뇌부는 ‘사정의 칼날’아래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이씨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썼다. 집권세력은 이씨를 달래고 검찰수뇌부는 이씨 사건을 없던 일로 만들기로 작정했다. 이씨는 정말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대선자금 비밀을 폭로하려 했을까. 92년 대선 이후 이씨를 은밀하게 만났던 모사업가의 전언. “이씨는 문민정부 출범 직후 자신이 사정 대상이 되자 김대통령에게 인간적인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어요. 주변사람들이 집권세력을 협박하면 보복당할 것이라고 충고했지만 이씨는 개의치 않더군요. 함께 죽으면 그만이라는 식이었지요.” 드디어 이씨와 집권세력간에 모종의 타협이 이뤄진다. ▼ 김대통령에 인간적 배신감 이씨가 일본으로 도피하기 직전인 93년 5월 중순경 서울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 특실. 이씨는 당뇨병 치료를 내세워 입원중이었다. 이씨가 병상에서 김대통령에게 지원한 대선자금 내용을 작성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대선 때 건네준 수표의 사본을 증거물로 갖고 있다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김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김기섭(金己燮)안기부기조실장이 병실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이씨와 대구영남고 선후배 사이인 김실장은 김대통령의 차남 현철(賢哲)씨와도 매우 가까운 사이. 김실장은 은근한 목소리로 병상의 이씨를 위로했다. “이의원님, 우리가 정권을 잡았는데 별 일이야 있겠습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씨도 자신의 문제가 김대통령에게 부담을 주는데 대해 다소 미안해하는 듯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이 각하께 부담이 되지 않겠습니까. 민자당 전국구의원직을 내놓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다시 김실장이 이씨를 안심시켰다. “괜찮습니다. 앞으로 별일 없을 겁니다. 마음 푹 놓으세요.” 이씨 소환문제를 놓고 검찰 수뇌부와 수사검사 사이에도 신경전이 점차 고조되고 있었다. 93년 5월10일경 김태정(金泰政)대검 중수부장 사무실. 수사검사인 대검연구관 함승희(咸承熙·현 변호사 개업)검사가 긴장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계좌추적 결과 이원조씨의 수뢰혐의를 뒷받침할 구체적인 물증을 확보했습니다. 이제는 소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중수부장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함검사, 현재 임시국회가 개회중이라 현역의원을 소환하기 쉽지 않을 거야. 임시국회가 20일 폐회된다니까 그때까지 기다려보지.” 검찰 수뇌부는 함검사가 계좌추적을 해나가는 동안에 직간접적으로 수사를 중단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함검사, 이제 그만 좀 해. 이원조 그사람 보통이 아니어서 알고 있는 것(대선자금 비밀)을 모두 불 수 있단 말이야.” 안영모(安永模)동화은행장이 이씨에게 돈을 줬다는 물증이 있어야만 이씨를 소환할 수 있다던 검찰 수뇌부는 함검사가 물증을 들이대자 “드디어 올 것이 왔다”며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김대통령은 이씨 문제에 대해 검찰에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었다. 김영수(金榮秀)전청와대민정수석의 기억. “검찰 수뇌부가 ‘이씨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느냐’고 여러번 물어왔지만 달리 해줄 말이 없었어요. 김대통령이 이씨 문제에 대해 아무런 지시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씨의 실체를 아는 검찰 수뇌부가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 김대통령은 왜 신세진 이원조씨를 잘봐주라고 하지 않았을까. 청와대 비서실에서 근무했던 관계자들의 설명. “김대통령은 이원조씨가 감히 대선자금 비밀을 불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이씨는 감옥에 가더라도 나중에 사면을 기대해야 할 처지였거든요. 김대통령은 사정과 관련해 절대 아랫사람에게 누구를 봐주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다만 밑에서 김대통령의 처지를 알고 적당히 처리하면 그냥 넘어가는 식이었죠.”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김대통령의 주변사람들이 이씨 문제의 처리를 둘러싸고 뭔가 ‘일’을 꾸미고 있는 듯했다. ▼ 김기섭씨 『걱정말라』 달래 당시 청와대에 근무했던 모인사는 평소 잘 아는 현철씨에게 넌지시 “이원조씨를 잡아넣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물어 보았다. 그러나 현철씨는 이씨 문제를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믿을 만한 구석이 있다는 투였다. “이씨 문제는 아버지쪽에서 알아서 하고 있으니까 신경쓰지 않아도 됩니다. 잘 될 겁니다.” 이원조씨가 일본으로 도피하기 며칠 전 함검사는 평소 잘 아는 모신문사 정치부 기자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그 기자는 “정치권에서 이씨가 해외로 도피한다는 얘기가 파다합니다. 단순한 소문만은 아닌 것 같아요”라고 귀띔해 주었다. 그러나 함검사는 집권세력과 검찰 수뇌부가 이씨의 수사를 집요하게 막고 있는 상황에서 이씨가 해외로 도피할 경우 오히려 처벌이 쉬워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89년 5공비리 수사 때 전두환(全斗煥)전대통령의 동생 경환(敬煥)씨가 수사 도중 갑자기 일본으로 출국했다. 그런데 비난여론이 비등해지자 전씨는 곧바로 강제소환돼 결과적으로 처벌이 앞당겨졌다. 함검사는 전경환씨사건을 참고한 것이다. 임시국회 폐회일이 다가오면서 함검사는 검찰 수뇌부에 다시 이씨의 소환을 건의했다. 검찰 수뇌부의 반응은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마침내 함검사는 궁여지책으로 검찰 상부에 타협안을 제시했다. 이씨를 잡아넣더라도 대선자금 비밀은 불지 않도록 설득하겠다는 것이었다. 함변호사의 기억. “이씨에게 ‘당신이 개인비리로 처벌받으면 대선자금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고 김대통령의 개혁사정도 성공할 것’이라고 설득하려 했어요. 물론 검찰도 사는 길이지요.” 결국 이씨는 5월18일 오전 일본으로 달아났다. 임시국회 폐회를 이틀 앞둔 날이었다. 이씨는 출국 1주일 전인 11일 외무부 여권과에 국회사무총장이 발행한 재직증명서를 첨부한 일반여권 발급신청서를 제출했다. 당시 외무부 관계자는 “이의원이 수뢰혐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여권을 신청한 사실에 주목했다”고 밝혔다. 이는 이씨의 일반여권 신청 사실이 상부에 보고됐음을 시사한 것이었다. 이씨가 수뢰혐의를 받고 있는데다 여권발급 사실이 정부당국에 의해 감지됐음에도 사건수사를 담당한 검찰은 이씨에 대한 출국을 금지하지 않았다. 슬롯머신 사건에 연루된 박철언(朴哲彦)의원이 국회 회기중 출국이 금지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일본으로 달아난 이씨는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 ‘나를 언제까지 일본에 뇌둘 것이냐’며 집권세력을 협박하고 있다는 얘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씨의 도피생활이 반년째로 접어든 11월1일. 대검중수부는 이씨 사건을 내사종결했다. 수사를 해보니 걸리는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함변호사의 설명. “이원조씨의 수사과정을 보면 권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일관되게 이씨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씨의 수뢰혐의를 입증할 완벽한 물증이 밝혀졌을 때 수사중단지시가 내려왔고 그 직후 이씨가 쉽게 해외로 도피했으니까요.” ▼ 취중에 흘린 엄청난 비밀 검찰 안팎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의 주인공으로 김기섭씨와 현철씨를 지목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김기섭씨는 “이원조씨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다. 나와 현철씨를 협박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이의원 문제가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진 94년 여름 어느날 서울 강북의 한 음식점. 사적인 모임에 참석한 검찰 고위간부 K씨가 술기운이 올랐는지 이씨 문제와 관련해 ‘원자탄급’ 발언을 했다. “병원에 있던 이원조씨에게 도망가라고 전화해준 사람이 나야. 국가를 위해 이의원께서 밖으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단 말이야.” 이씨의 해외도피가 집권세력과 검찰 수뇌부의 ‘합작품’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또한 김대통령의 사정이 초기부터 한계를 지녔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을 입증하기라도 한 것일까. 이씨는 동화은행비자금 사건이 끝나고 3년반이 지난 97년 4월28일 두 전직대통령 비자금사건으로 결국 구속되고 말았다. [이원조 관련일지] △93.5.18〓이원조씨, 일본으로 도피 △93.11.1〓대검중수부, 이씨 사건 내사종결 △94.10.15〓이씨, 일본에서 귀국 △95.11.23〓이씨, 노태우전대통령 비자금사건으로 검찰출두 △95.12.5〓대검중수부, 이씨 불구속 기소 △96.8.26〓서울지법, 이씨에게 징역 3년 선고 △96.12.16〓서울고법, 이씨에게 징역 2년6월 선고 △97.4.17〓대법원, 이씨에게 징역 2년6월 확정판결 △97.4.28〓대법원 판결확정로 이씨 구속수감 △97.12.22〓특별사면으로 이씨 석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