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하원의장직이 공석임을 선언합니다.”
3일(현지 시간) 케빈 매카시 미 하원의장에 대한 해임결의안이 통과되자 워싱턴 국회의사당에 정적이 흘렀다. 야당 공화당의 한 의원은 같은 당 소속인 매카시 의장의 해임을 주도한 공화당 강경파 의원들을 향해 “이제 어떻게 할 거냐(Now what)?”라고 소리쳤다.
연방정부 셧다운(일시 업무정지)의 위기를 일시 봉합하자마자 터진 초유의 하원의장 해임 사태에 미 정계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대혼돈에 빠졌다. 대화와 타협을 바탕으로 현대 민주주의의 중심임을 자부해 온 미 외희에서 ‘비토크라시(vetocracy·반대를 위한 정치)’가 기승을 부리면서 정국 혼란이 장기화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 의원 8명이 이끈 극단적 거부정치
‘거부권(veto)’과 ‘정치(cracy)’의 합성어인 비토크라시는 상대방의 정책과 주장을 무조건 거부하는 극단적 당파 정치를 뜻한다. 2013년 오바마케어 도입을 둘러싼 민주당과 공화당의 갈등으로 미 연방정부가 폐쇄됐을 때 이를 개탄한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교수가 사용하며 널리 알려졌다.
이날 해임은 내년도 예산안을 둘러싼 공화당 내분에서 시작됐다. 매카시 의장은 연방정부가 폐쇄 위기를 맞자 최근 조 바이든 행정부와 합의해 45일짜리 임시예산안을 통과시켰다. 그러자 재정적자 감축을 중시하는 공화당 강경파 의원모임 ‘프리덤코커스’가 거세게 반발했다. 프리덤코커스 소속 맷 게이츠 하원의원은 2일 하원의장 해임안을 전격 제출했고, 하루 만에 이뤄진 표결에서 예상을 깨고 가결까지 몰고 갔다.
2015년 설립된 프리덤코커스의 소속 인원은 약 45명. 이 중 매카시 의장의 해임에 찬성한 사람은 8명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해임이 이뤄진 것은 공화당이 하원 435석의 과반(218석)보다 불과 3석만 더 보유했기 때문이다. 221석의 근소 우위 다수당이기에 당내 의원 중 일부만 이탈해도 주류의 뜻과 완전히 다른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이날도 내년 대선을 앞두고 집권 민주당 의원 전원이 매카시 하원의장에 대한 거부감과 공화당 내홍을 내심 기대하며 당론으로 찬성표를 던졌고, 여기에 공화당 강경파 8명의 이탈로 해임안이 통과됐다.
프리덤코커스는 그간 비토크라시를 무기로 의회를 마비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전임자인 폴 라이언 전 하원의장은 프리덤코커스와의 힘겨루기 끝에 2019년 아예 정계를 은퇴했다. 매카시 의장은 올 1월 의장 선출 당시 프리덤코커스의 반대로 15차례의 표결을 거쳐 간신히 의장이 됐고 9개월 만에 쫓겨났다.
매카시 의장은 “협상을 통해 해결책을 찾으려 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면서 의장직을 사퇴했다. 그러면서 프리덤코커스를 두고 “모든 것을 반대한다”고 비판했다.
● “후임 의장 선출 어려워”…파행 장기화
하원은 이르면 11일 신임 의장을 선출하기로 했다. 백악관은 이날 긴급 성명을 내고 “미국이 처한 시급한 과제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신속한 의장 선출을 희망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매카시 의장은 다시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강경파에 휘둘리는 정치 환경 속에서 어떤 공화당 지도부 출신 인사도 선뜻 나서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해임안을 주도한 게이츠 의원은 “스티브 스컬리스 원내대표를 차기 의장으로 지지한다”고 밝혔다.다만 혈액암 투병 중인 데다 본인의 의지 또한 강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미 정계 혼란의 장기화는 불가피하다. 서정건 경희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의원 8명 때문에 하원의장이 축출된 것은 ‘50 대 50’ 정치가 초래한 결과이자 참상”이라고 진단했다. 이종곤 이화여대 교수(정치외교학)는 “하원의장 해임이 처음 한 번만 어려울 뿐”이라며 “누가 신임 의장이 돼도 프리덤코커스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민주당에 조금이라도 협조하려면 (해임)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 정치 불확실성이 높아졌다”라고 했다.
워싱턴=문병기특파원 weapp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