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진흙 천지였다. 도시의 흔적은 없었다. 부서진 집 지붕 위에는 승용차가 흉물스럽게 찌그러져 있었다. 진흙바닥에는 부서진 창고에서 튀어나온 음료 캔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이곳이 정말 사람이 살던 곳이었는지.
4일 경기 남양주시 별내동 중앙119구조본부에서 만난 황재동 현장지휘팀장(49소방령)은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 현장을 이렇게 기억했다. 황 팀장은 대지진 이튿날인 12일 1차 선발대에 이어 14일 군용기 편으로 2차 구조대 102명과 함께 미야기() 현 센다이()에 도착했다.
현장은 참혹했다. 지진해일(쓰나미)은 도로와 건물을 삼켜버렸다. 흙투성이가 된 사진첩과 가재도구만이 이 주변이 주택가였음을 짐작하게 할 뿐이었다. 수많은 화재 폭발 재난 현장에 출동했던 황 팀장이었지만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그해 3월의 센다이에는 우박이 내리고 여진(지진의 여파)이 계속됐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머뭇거릴 새가 없었다. 황 팀장은 3개 팀 가운데 3조 팀장을 맡아 구조작업에 나섰다. 대지진이 발생한 지 이틀이 지났지만 아직도 어딘가에 생존자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사자(죽은 이)보다 생명이 남아 있는 이를 찾아야 했다.
한국 구조대는 센다이 구석구석을 뒤졌지만 끝내 생존자를 찾을 수 없었다. 바닷가의 한 학교 교실에는 어린이들의 가방만 쌓여 있었다. 그 옥상에선 쓰나미에 휩쓸린 것으로 보이는 한 여성의 시신이 발견됐다. 진흙 속에 박힌 차량 안에선 뭔가 움직이는 듯한 물체가 보였다. 한참 진흙을 파헤쳐 문을 열었을 때 황 팀장은 힘이 빠졌다. 한 남성이 사이드브레이크를 잡은 채 숨져 있었다. 그렇게 구조대는 남성 12구, 여성 6구의 시신을 거뒀다. 이들을 천으로 감싼 뒤 예를 갖춰 묵념을 했다.
대지진 당시 러시아 미국 호주 독일 중국 등 16개국 880명의 구조대가 참여했다. 하지만 대부분 중도 철수했다. 쓰나미로 파괴된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나온 방사성 물질 수치가 높아졌기 때문. 그럼에도 한국 구조대는 마지막까지 센다이에 남아 수색작업을 이어갔다.
황 팀장은 당시 센다이의 한 목조주택을 수색하던 때를 잊지 못한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근처에 가족사진이 떨어져 있었다. 아이의 글러브와 찌그러진 자전거도 보였다. 그 단란했던 가족이 어디로 갔는지 가슴이 먹먹했다. 요즘도 가끔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날 취재에 동행한 일본 아사히신문 나카노 아키라 서울 특파원은 황 팀장에게 만약 동일본 대지진 같은 재해가 또 발생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언제든 다시 달려갈 것이다. 더 이상 이런 가슴 아픈 재난이 없어야겠지만.
남양주=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