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내린 비는 멈출 기색이 없었다. 희멀건 구름이 산허리를 싸고돌고, 뿌연 물안개가 내려앉다 동구 밖에서 흩어졌다. 오동나무 너머엔 빨간 슬레이트 지붕들이 기대섰다. 코끝을 감싸는 두엄 냄새가 아득한 순간, 세찬 빗방울이 타다닥 뺨을 때렸다.
그렇다. 여긴 감상에 젖을 시골마을이 아니다. 민간인출입통제구역(민통선)에 있는 통칭 민북마을. 전쟁의 핏빛 포화가 아린 재건촌 이길리였다.
12일 행정구역으로는 강원 철원군 동송읍에 속한 이길리 마을을 찾으며 놀란 것은 두 가지였다. 민통선이 이다지 가까웠나. 폭우로 교통체증에 시달리고도 차로 2시간 만에 당도했다. 또 한 가지, 이렇게 평범한가. 마을 입구 군 초소에서 신분 확인을 받지 않았다면 한국의 시골 어디라 해도 믿었을 법한 풍경이었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까요. 우승하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는 허허롭게 웃어 보였다. 우 연구사는 민속조사를 위해 올해 초부터 마을에 상주하고 있다. 처음엔 그저 흔한 강원도 마을 아닌가 걱정했죠. 하지만 살아보면 압니다. 625전쟁이 끝나고 60년이 흘렀지만 상처는 지워진 게 아닙니다. 세월에 아물어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죠.
그의 말대로 이길리는 결코 전쟁과 떼어놓을 수 없는 곳이다. 1945년 광복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이길리는 이념의 혼돈에 휩싸였다. 북한에 편입된 철원에는 소련군이 주둔했다. 평양에서 지도위원이 내려와 붉은 깃발을 흔들었고, 순박했던 총각이 완장을 차고 유산계급 퇴출을 외쳤다.
일제 때 초등학교 교사를 지낸 김영배 씨(88)는 당시 김일성이 철원 금화를 중요한 요지로 여겼다고 들었다. 당에서 열성부락이네 뭐네 공을 많이 들였다고 말했다. 충돌도 심심찮게 벌어졌다. 어디론가 끌려가 사라지고, 목숨 걸고 38선을 넘는 이들도 많았다.
625가 터졌을 때 마을은 오히려 조용했다. 어차피 북한 땅이었으니. 전쟁의 공포를 실감한 것은 국군이 북진하고 14후퇴가 벌어지면서였다. 마을은 치열한 전투 속에 형체도 남지 않고 파괴됐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철의 삼각지였으니 보존을 기대하긴 무리였다. 어르신들은 목숨 건사하느라 바빠 마을 챙길 틈이 없었다고 안타까워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맺어졌다. 다행히 이길리는 한국 영토가 됐다. 하지만 민간인 통제로 묶여버렸다. 주민들은 내 마을을 지척에 두고도 멀리서 시름시름 바라만 봤다.
그나마 출입이 허락된 것은 3년 뒤. 3명 이상 자전거로 이동해야 하고, 빨간 모자를 쓴 남성만 가능한 일일출입 조건부 허가였다. 1962년에서야 농번기 임시거주가 허락됐다. 군용트럭을 타고 이동하고, 아침저녁 군대 점호를 받았다. 사람이 숨을 만한 옥수수는 심지 못했다. A 씨(84)는 1965년쯤 장마에 북한에서 소가 떠내려 왔는데 그걸 자유 찾아 탈북한 소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하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마을이 재건촌이 된 것은 1971년. 재건촌이란 북한 선전촌에 대응해 세운 마을. 김명찬 마을이장(58)은 군사정부 시절까지 여전히 점호가 유지되고, 1990년대에도 지뢰폭발사고가 나는 등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주민들도 세월 따라 천천히 적응해 갔다고 말했다.
그렇게 60년을 버틴 이길리는 지금은 매우 거주 만족도가 높은 마을로 탈바꿈했다. 여전히 야간통행금지 같은 불편한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치안이 좋다. 주민들은 모든 문을 열어두고 열쇠를 갖고 다니지 않는단다. 군의 대민지원도 원활하다. 이춘희 씨(52)는 민북마을이 풀린다고 하면 모두 시위를 벌일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인근 한 마을은 몇 해 전 주민 요청으로 민북마을을 해제했다가 도둑이 들끓어 민심만 흉흉해졌다.
이곳 주민에게 안보는 특별한 의미가 없었다. 얼마 전까지 북한의 대남방송이 들렸다는데 남북관계는 아예 신경도 쓰질 않았다. 정치 이슈에도 관심이 없었다. 한 마을주민은 전쟁 나서 미사일 쏘면 서울로 날아가겠지라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해질녘 마을을 나서는데 마을회관 옥상에 두루미 모형이 눈에 띄었다. 지난해 시작한 천연기념물 두루미 축제 상징물이다. 정전 60년은 민통선을 천혜의 자연보고로 만들었다. 주민들은 이제 마을이 더이상 안보 체험학습장이 아닌 생태관광지가 되길 원한다.
철원=정양환 기자 ray@dong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