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to contents

황혼구타 노인, 노인에 맞고 산다(일)

Posted August. 20, 2010 08:39,   

8월 2일 아침 8시 20분쯤.

18일 만난 김 할아버지(86)는 말 한마디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힘도 없고 귀도 안 들린다. 하지만 누가 이렇게 때렸어요?라는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땅에 떨어져있던 지팡이를 손에 들었다. 자기 방어에서 나온 행동처럼 보였다.

자다가 일어났는데 갑자기 그 X(부인)이 방망이로 내 머리를 내려쳤어 머리가 터져서 얼굴이 까매지고 그걸 막으려 하니 아들이 내 팔을 붙잡고 여기 (오른손) 검지손가락이 이렇게 찢어졌어 이렇게 산 지가 1년이 넘었지.

그는 바지를 걷어 올렸다. 와이셔츠도 벗었다. 온몸이 벌건 얼룩 투성이였다. 주전자에 담긴 뜨거운 물이 몸에 쏟아져 화상도 입었고 방망이로 맞아 피멍도 들었다. 황혼녘 얄궂은 기억을 안겨다준 사람은 다름 아닌 일흔 여섯의 재혼한 부인이었다. 김 할아버지는 지난주 집을 뛰쳐나와 서울 강동구의 한 양로원에서 지내고 있다. 이곳은 서울시가 지정한 학대 노인 일시보호시설이다.

노인이 노인을 때리는 시대

김 할아버지가 부인으로부터 맞고 산 지는 1년이 넘었다. 몇 년 전 그는 개인 문제로 법적 소송에 휘말렸다가 패소하고 말았다. 집과 재산을 모두 날린 뒤 당뇨병에 요실금까지 와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그런 상황에서 부인은 당신 때문에 내 인생을 망쳤다며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김 할아버지도 맞대응을 하기도 했지만 부인이 밀어 아스팔트 바닥에 넘어지면서 척추를 다친 이후부터는 지팡이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생활비도 벌어오지 못한다며 밥도 하루 두 끼만 먹어야 했다. 요실금 탓에 오줌이라도 흘리는 날엔 더럽다며 더 때렸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아들은 그에게 뜨거운 물을 끼얹고 집에 불을 지르는 등 온통 쑥대밭을 만들었다.

김 할아버지의 매 맞는 인생은 이를 목격한 한 구청 직원이 신고하면서 일단락됐다. 부인과 가족들과 떨어져 산 지 1주일이 넘었지만 그는 나를 쓰레기 취급하는 그곳(집)에 다시는 가기도 싫다며 단호하게 말했다.

고령화 시대를 맞아 노인이 노인으로부터 매 맞는 이른바 노()-노() 학대 피해 노인이 급격히 늘고 있다. 2009년 서울시가 파악한 노인학대 신고자는 669명으로 2008년 521명보다 28.4% 증가했다. 이 가운데 60세 이상 노인 간에 벌어지는 노-노 학대 비율은 2008년 전체 학대 사건의 26.7%였으나 지난해 30.7%로 늘었다. 특히 노인 학대 주체는 60대 이상이 130명으로 31%를 차지했다. 기존에 노인을 주로 때렸던 40대(24.5), 50대(26.9)의 비율도 뛰어넘었다. 매 맞는 피해자도 80세 이상 피해 노인이 전체의 38%(130명)로 점점 고령화되는 추세다.

서울 노인 100만 시대 폭력으로 얼룩진 황혼

김 할아버지가 있는 양로원에는 최근 노-노 학대로 입소하는 노인들이 최근 부쩍 늘었다. 99세 김 할머니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예순이 넘은 친아들로부터 폭행을 당해 이곳에 왔다. 알코올의존증환자인 아들은 술만 마시면 전기밥솥부터 전자레인지 등 집안 도구들로 김 할머니를 때렸다. 분홍 저고리를 곱게 차려입은 김 할머니는 (자식 잘못 키운) 내 잘못이지라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권금주 서울사이버대 복지경영학과 교수는 노-노 학대는 2011년 서울의 65세 노인 인구가 100만을 돌파하는 등 우리 사회가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노-노 학대의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사회적 취약층에서 주로 발생하기 때문에 가족 문제로만 접근해서는 해결이 어렵고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서울시 노인보호전문기관인 재단법인 천주교 까리따스수녀회 유지재단 정미정 과장은 30, 40대 자녀들이 노인을 학대하는 것은 대부분 부양 부담 때문이지만 노-노 학대는 배우자 간, 늙은 자녀와 부모 간 등 관계도 다양하고 원인도 복잡하다고 말했다. 배우자 간의 노-노 학대도 가정 폭력이 노년까지 이어지거나 반대로 과거 폭력이나 괴롭힘을 당한 배우자가 울분을 터뜨리는 경우, 병든 배우자 수발이 귀찮아 방임하는 사례 등 원인이 다양하다. 자녀-노부모 간 노-노 학대는 자녀도 나이를 먹어 경제적으로 능력이 없거나 일상생활이 힘들어 자포자기해 부모를 학대하는 사례가 많다.

그러나 학대 받는 노인을 보호할 일시보호시설은 서울 2곳 등 거의 미비한 실정이다. 서울시는 지난달 경기 군포시에 학대노인 일시보호시설을 한 곳 추가로 지정했고 현재 한 곳뿐인 노인보호전문기관을 2014년까지 5곳을 세울 계획이다. 김명용 서울시 노인복지과장은 특히 노-노 학대 비중이 늘고 있어 노-노 학대와 관련된 상담을 특화시킨 노-노 케어 상담 서비스 등을 적극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김범석 bsis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