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한국-미국전이 열린 10일 전국에서 거리응원에 나선 시민은 81개 지역에 100만명이나 됐다. 열광과 흥분의 현장은 11일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87년 6월 항쟁 이후 최대 인파가 거리에 나섰지만 우려했던 무질서한 행동이나 반미시위 등이 전혀 나타나지 않아 성숙한 질서의식과 시민정신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부분의 시민은 이날 폭우 속에서도 뒷사람을 배려해 우산도 쓰지 않은 채 응원했다. 또한 경기가 끝난 뒤에는 비에 젖은 쓰레기를 치우는 멋진 모습을 보여줬다.
30여만명이 운집한 서울 종로구 세종로 사거리 일대와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는 많은 시민이 경기가 무승부로 끝난 것을 못내 아쉬워하면서도 깔고 앉았던 종이와 음료수병, 휴지 등을 청소하기 쉽도록 한곳에 모아놓고 자리를 떠났다.
이날 비를 맞으며 밤늦게까지 거리를 청소한 서울 광양중 2년 이희권군(14) 등 이 학교 학생 10여명은 사람들이 떠난 거리를 보니 청소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경기에서 이기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서울 종로구청 청소행정과 이상호(51) 팀장은 평소 10시간이 넘게 걸리는 청소 작업이 어제는 3시간만에 끝났다며 물어 젖어 바닥에 달라붙은 종이를 손으로 긁어모으는 청소년과 시민들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응원 문화도 한 단계 높아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날 서울 지역에는 오후 늦게부터 비가 쏟아졌지만 시민들은 자리를 그대로 지키며 응원에 열중했고 뒷사람의 관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대부분 우산도 사용하지 않았다.
서울 여의도 한강시민공원 야외무대에서 경기를 관람한 회사원 이희근씨(36)는 내가 우산을 쓰면 뒷사람이 관람하는데 지장을 받지 않겠느냐며 모두가 한마음으로 응원하는데 나만 비를 맞지 않겠다고 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올 초 미국 동계올림픽 쇼트트랙에서 김동성 선수가 분패한 이후 반미감정의 확산으로 당초 우려됐던 반미시위도 기우에 그쳤다.
경찰은 이날 서울 종로구 세종로 미 대사관과 주변 지역에 6000여명의 경찰관을 배치하고 대사관 주변을 차량으로 에워싸는 등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으나 우려와는 달리 아무런 불상사도 없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날 오전 미 대사관 앞에는 한때 주한미군을 규탄한다는 유인물이 뿌려졌지만 시민들은 월드컵 경기와 반미감정은 별개라며 외면했다.
경기가 열린 대구 월드컵경기장에서도 미국팀에 대한 비방이나 야유는 눈에 띄지 않았으며 오히려 미국팀 선수가 멋진 플레이를 선보일 때 박수까지 쳐주는 여유를 보였다.
서울 서초경찰서는 당초 이날 저녁 경찰 300여명을 동원해 미국 선수단 숙소인 서초구 방배동 메리어트 호텔 주변을 경비할 예정이었으나 취소했다.
서울시 소방방재본부도 이날 세종로 사거리와 서울시청 앞, 마포구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등 주요 거리응원 지역에 구조 및 화재진압 인력을 배치했으나 응급신고는 한 건도 접수되지 않았다.
이날 시민들이 보여준 성숙한 질서의식과 시민정신에 대해 현택수(사회학) 고려대 교수는 시민의식과 개인주의가 더욱 좋은 방향으로 성숙돼 가는 것 같다며 진정한 개인주의는 개인의 즐거움과 집단에 대한 책임의식까지 포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진구 길진균 sys1201@donga.com leon@dong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