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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임오군란 떠올리는 임오년

Posted January. 07, 2002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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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년이 시작되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1882년엔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요즘 한창 방영되고 있는 명성황후에서 임오군란은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권력투쟁으로만 묘사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식민사관의 영향이다. 임오군란의 원인은 외척 세도정치의 본질 및 외세에 대한 대응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조선은 문치주의를 지향하여 문화국가로서 정체성을 확고하게 다진 사회였다.

여기에 이질적인 문명인 서구 제국주의가 밀려오던 19세기 후반에 대원군은 섭정을 하며 양반에게도 세금을 물리는 호포법을 시행하고 기득권에 안주하는 유림의 근거지인 서원을 철폐하는 등 대대적인 내정개혁을 단행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 1866년 일어난 병인양요는 서구열강의 침략성에 대한 인식과 함께 이들과 싸워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당시 지식인들은 서구열강과 그에 편승한 일본이 문호개방을 요구하는 목적은 그들의 조악한 공산품과 우리의 생필품을 교역하려는 것이므로 섣불리 문을 열었다가는 우리 경제가 파탄에 이를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었다.

국민의 위기의식은 너무나 낯선 대상과 그에 의하여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대원군이 전국에 척화비를 세운 것도 이러한 국민적 공감대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조선후기 사회는 약탈과 침략을 일삼고 평화를 저해하는 존재를 오랑캐로 규정하여 그러한 행위의 당사자인 군사대국 청나라에 대해 심복하지 않고 청을 쳐 복수설치(쑝)하겠다는북벌론이 국론이었다.

나아가 조선이야말로 동아시아 최고의 문화국가며 문화중심국이라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한 조선의 시각으로 볼 때 자급자족하는 농경사회에 대포와 군함으로 무장하고 개방을 강요하는 서구열강을 위협적인 오랑캐로 여겨 척화비에 양이(서양 오랑캐)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원군은 조선후기 사회가 지향해온 내수외양(내치를 닦고 외부의 적을 물리친다) 정책을 충실하게 계승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시대를 읽는 눈이 민씨 정권에 비하여 한발 늦었다고 할까.

고종의 친정을 명분으로 등장한 민씨 척족정권은 대세를 읽고 개화정책으로 선회하는 기민성을 발휘하였다. 이미 외세는 걷잡을 수 없이 발빠르게 밀려오고 그 전위가 된 일본과의 관계 설정이 급선무라는 현실인식을 갖고 있었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시작으로 일본과 새로운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니 기존의 통신사()가 아니라 수신사()를 파견하였다.

1881년에는 개화정책을 전담하는 통리기무아문이라는 새로운 기구를 설치하고 무기 제조 등 군비를 학습하기 위하여 중국에 영선사를 파견하고 일본의 근대화를 시찰하기 위하여 신사유람단을 파견하였다.

서구열강과 수호조약을 차례로 체결하고 일본식 군대를 양성하기 위하여 별기군을 창설하였다. 이른바 자주적인 개화정책의 추진이었고 이는 고종과 민비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화정책은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소수 엘리트에 의하여 강행되었다는 한계성과 아울러 민씨 척족정권이 자신들의 정권유지 차원에서 밀고 나갔다는 치명적인 취약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결과가 임오군란이라는 사건으로 터져 나왔던 것이다. 별기군에 대한 특별대우와 상대적으로 대우받지 못한 불만은 군란의 단서가 된 것이고, 더욱 근본적인 이유는 노선문제였으므로 대원군의 재등장은 필연적이었다.

그로부터 1세기가 훨씬 지난 오늘 우리는 또다시 세계화라는 거대구도의 재편에 직면하며 방향설정에 고민하고 있다.

내실 없이 현실론에 입각한 외세 지향성이 위험한 것과 똑같이 무조건적인 외세배격도 위험한 것임은 불문가지다. 분명한 것은 같은 일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역사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 볼 시점이다. 국가의 방향은 정권유지 차원에서가 아니라 국가의 백년대계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세워져야 한다.

말띠 해가 변화를 요구하는 해라면 변화를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정옥자(서울대 교수,국사학,본보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