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도권 놓고 국내 정치세력 대립… 남-북 분열돼 남한에서만 선거 실시 글 모르는 국민 많아 자율성에 한계, 중요 세력 불참 등 아쉬운 점 남지만 역사상 최초의 선거로 큰 의미 지녀
1948년 5월 10일 서울 개운사에 마련된 동대문을 지역구 투표소 앞에서 한 가족이 입후보자들의 선거공보를 보고 있다. 사진 출처 미국 국립문서기록청
○ 분열 속 치러진 남한 단독선거
광복 이후 국내 정치 세력들이 가장 극심하게 대립한 시기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결정 사항이 국내에 알려진 이후와 유엔 총회가 한반도에서 남북한 총선을 실시하라고 결정한 시기입니다.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결정 사항은 ①한국에 임시민주정부 수립 ②임시정부 수립의 절차를 논의하기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의 개최 ③최장 5개년간의 미국 소련 영국 중국 4개국의 신탁통치 등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 결정에 대해 김일성과 박헌영 등 좌익 세력은 총체적 지지를 선언하였고, 김구와 이승만 등 우익 세력은 신탁통치가 또 다른 식민통치라고 생각하여 신탁통치반대운동(반탁)을 전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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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높은 문맹률-대규모 충돌 속 치러진 선거
미군정과 유엔 위원단은 자유롭고 민주적인 선거를 치르기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거가 사실상 불가능했는데,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선거를 감시하는 유엔 위원단의 수는 실제 30여 명에 불과해 선거 감시가 형식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미군정이 제공한 통역관의 도움을 받는 소수의 유엔 위원단원이 1만3000여 개 투표구에서 1000만 명에 가까운 유권자의 선거 관련 행위를 감시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둘째, 당시 남로당 세력은 총선을 저지하기 위해 노동자 총파업, 무장봉기 등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남로당은 선거가 임박한 5월 7일부터 선거 저지를 위한 총력 투쟁에 나섰습니다. 이 과정에서 살인, 선거사무소와 철도 노선 파괴, 전화선 절단 등의 폭력 사건이 발생했고, 검거되거나 투옥된 인원이 5425명, 사망자가 350명에 이르렀습니다. 셋째, 선거에 참여하는 인구의 약 80%가 문맹이었고, 그 선거마저 역사상 최초의 선거였다는 점입니다. 선거법에 따라 유권자가 투표권을 행사하려면 스스로 선거인명부에 등록해야 했습니다. 대부분이 문맹이었던 국민은 선거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선거의 절차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대부분 유권자는 공무원, 경찰, 마을 이장 등의 도움을 받아 선거인명부에 등록하고 선거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5·10총선거는 중요 정치 세력의 불참뿐만 아니라 선거 과정에서도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전국 200개 선거구 1만3272개 투표구에서 투표가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유권자 수는 983만4000명, 유권자 중 등록인은 783만7504명이었습니다. 총 유권자 대비 투표율은 71.6%였고, 등록 유권자 대비 투표율은 95.5%였습니다. 총 유권자 대비 투표율은 이후 실시한 국회의원 선거 투표율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한계 많지만 민주주의 ‘첫발’ 의의
제헌 의원을 선출하기 위해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총선거 홍보 포스터. 사진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198석 중 무소속이 85석을 차지한 것에 비해 이승만의 독립촉성국민회는 55석, 한국민주당은 29석밖에 얻지 못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선거를 주도한 양대 세력을 모두 합해도 84석에 그쳐 선거를 주도한 세력이 과반을 획득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소속 국회의원의 성향을 분석한 여러 연구결과에 의하면 무소속 의원 중 한국민주당계는 47석, 독립촉성국민회계는 6석, 김구와 김규식 등을 지지하는 세력은 20여 석, 기타 세력은 10여 석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실제 의석수는 한국민주당이 76석, 독립촉성국민회가 61석을 차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승만 정부 시기 한국민주당이 강력한 야당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보이지 않는 의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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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환병 서울 고척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