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100세로 별세한 ‘은명의원’ 김경희 원장이 서울 노원구 상계동 수락산 자락의 판자촌에 내과를 연 것은 1984년이었다. 개원 후 무료 진료를 했으나 진료의 질이 낮을 거라 여겨 찾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1000원 진료’를 했는데 당시 택시 기본요금이 800원 정도였다. 고교 3학년 때 폐결핵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그는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는 기도를 했고 평생 그 약속을 지켰다. 가난한 주변 친구들이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모습을 본 그는 일제강점기였던 세브란스의전 2학년 때부터 보육원 아이들을 위해 무료 봉사에 나섰다. 광복 후엔 서울역에서 중국과 일본에서 돌아온 교포를 치료했다. 1970년대에는 판자촌을 돌며 무료 진료를 이어갔고 2004년 노환으로 병원 문을 닫기 전까지 홀몸노인을 위한 무료 왕진도 다녔다.
▷‘상계동 슈바이처’의 타계가 더욱 애잔하게 느껴지는 것은 ‘동네 의원’ ‘왕진 가방’ 등으로 상징되는 신뢰, 봉사의 의사 이미지가 옅어지는 세태 때문이 아닌가 싶다. 여러 차례의 의료 분쟁과 일부 진료 과목의 과당경쟁은 ‘의술과 상술’의 이미지를 뒤섞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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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원장이 병원 문을 닫은 지 16년이 지났지만 그가 작고했다는 소식에 애도하고 아쉬워하는 것은 그의 헌신과 사랑의 여운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병원 문을 닫기 3년 전부터 건강이 악화됐으나 “내 손이 안 가면 도움을 받던 (가난한) 사람들이 영향을 받는다”며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슈바이처의 어록 중 “나는 오직 한 가지 외에는 아는 것이 없다. 진실로 행복한 사람은 섬기는 법을 갈구하며 발견한 사람이다”고 했는데, 김 원장은 그런 의미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