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기부 선정 ‘2019 과학기술유공자’ 이충구 前 현대차 사장
국내 첫 고유모델 자동차 ‘포니’ 개발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한국 자동차 산업의 기틀을 마련한 이충구 전 현대자동차 사장이 18일 서울 강남구 KAIST 도곡캠퍼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윤신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ashilla@donga.com
18일 오후 서울 강남구 KAIST 도곡캠퍼스 과학기술유공자 라운지에서 만난 ‘포니’ 개발의 주역 이충구 현대자동차 전 사장(74·한국자동차공학한림원 회장)은 ‘한국 산업화의 결정적 장면’ 중 하나로 꼽는 포니 개발이 ‘아직 끝나지 않은 미완의 프로젝트’라고 말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수준의 ‘성공’에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동차 입국’을 이룬 것은 뿌듯한 일이지만 아직 만족할 수 없다는 자동차 장인의 결기가 느껴졌다.
‘한국 자동차의 살아 있는 전설’인 이 전 사장은 이달 18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선정한 과학기술유공자에 선정됐다. 고(故) 김시중 전 과학기술처 장관, 고 김정식 대덕전자 전 회장, 자원학자 고 박동길 인하대 명예교수 등 12명과 함께 과기 분야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50년 전만 해도 자동차 산업에서 ‘무명’에 가까웠던 한국을 세계적 강국으로 이끈 신호탄인 포니 개발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이후 설계책임자로 주요한 자동차 개발을 진두지휘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자동차 전문가가 과학기술유공자에 선정된 건 처음이다. 이 전 사장은 “한 개인이 아니라 한국 자동차 산업이 인정을 받은 것으로 봐야 한다”며 “자동차 산업을 일으키는 데 힘써 온 다른 숨은 주역들에게도 관심을 가져 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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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이탈리아 토리노 모터쇼에서 처음 공개된 포니1의 모습. 현대자동차 제공
고유 모델을 만들 필요성이 제기됐다. 포드, 제너럴모터스, 르노 등 내로라하는 선진국 자동차 회사를 찾아갔지만 ‘턱도 없다’는 답변만 되돌아 왔다. 일본 미쓰비시자동차로부터 뒷바퀴 힘으로 달리는 후륜구동엔진과 변속기, 조향장치 등 차량의 뼈대를 이루는 섀시 기술을 구입하기로 하면서 국산 모델 개발에 시동이 걸렸다.
이 전 사장은 “그때까지도 고유 모델이 뭔지 몰랐다”며 “어쨌든 뼈대 만드는 기술은 확보했으니 차체를 설계해야겠다는 생각에 이탈리아 자동차 디자인 전문업체(카로체리아)인 이탈디자인에 의뢰해 디자인을 확정했다”고 말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1975년 포니 1호차가 출고됐다. 이듬해엔 1976년 에콰도르를 시작으로 수출에도 나섰다. 한국은 그렇게 세계 9번째 고유 모델 보유국이 됐다.
이 전 사장은 까다로운 미국 시장을 목표로 여러 번 ‘승부수’를 던졌다. 후륜구동 대신 당시 자동차 업계의 주류였던 전륜구동 엔진을 사용한 포니엑셀을 1985년 선보였고, 이 차로 1986년 처음으로 미국 시장을 두드려 그해에만 17만 대를 파는 돌풍을 일으켰다.
막상 미국에 진출해 성공을 거뒀지만 이후 쏟아지는 까다로운 미국 소비자들의 불평과 드러나는 문제점들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불만은 인테리어 도장부터 승차감까지 다양했다. 다시 승부수를 던졌다. 당시 사용하던 미쓰비시의 전륜구동 엔진을 버리고 완전히 다른 새로운 전륜구동 엔진을 자체 개발했다. 이 전 사장은 “수천억 원의 비용을 추가로 들여야 하는 큰 결심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투자는 결실을 맺었고, 1994∼1995년 한국은 차체부터 섀시까지 전부 자체 개발한 명실상부한 진짜 고유 모델인 ‘엑센트’와 ‘아반떼’를 출시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그는 현대자동차의 플래그십 자동차인 에쿠스까지 거의 모든 라인업을 구축하는 데 관여했다. 최고기술책임자(CTO)이자 사장으로서 현장에서 수많은 자동차의 개발을 진두지휘한 리더십의 비결을 묻자 “그냥 자동차에 미쳐 일만 했을 뿐, 리더로서는 부족했다”고 말했다. 이 전 사장은 재직 시절 직원들 사이에선 무서운 ‘타이거(호랑이)’로 불렸다. 그는 “조그마한 것이라도 잘못된 것을 발견하면 풀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완벽주의가 있었다”며 “돌이켜 보면 리더에게 완벽주의는 감점 요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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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신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ashill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