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의 화재 겪고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장사 시작
점심 손님이 모두 물러간 시간을 골라 약속을 정했음에도 식당은 그리 한가하지 않았다. 배달 전문 밥집치고는 테이블 수도 제법 되고, 드나드는 손님들도 꽤 있었다. 문을 밀고 들어서자마자 하명숙 씨의 손을 덥석 잡으며 그간의 안부를 묻는 손님부터 아이들 손을 이끌고 온 가족 단위의 손님들, 혼자 밥을 먹을 수 있는지 물어보는 손님도 있었다. 그래도 안말쉼터 운영은 ‘배달’이 중심이다. 배달은 배달인데 흔히 생각하는 중국집 배달 음식 같은 것이 아니다. 진짜 한 상 차려지는 집밥이다. 찌개며 밑반찬, 나물에 고기볶음 같은 것들도 곁들여진다. 한마디로 의정부시 전역을 대상으로 하는 ‘함바집’이다. 의정부 시내의 대형 마트부터 크고 작은 공장, 옷 가게, 미용실, 세탁소까지 안말쉼터 배달 밥을 고정적으로 대 먹는 곳만 50군데가 넘는다.
“여기로 오기 전에는 서울 수유리의 수유시장에서 11년 동안 뜨개방과 분식집을 했어요. 거기 있는 동안 불이 세 번이나 났어요. 꽤 큰 주상복합 건물이었는데도 화재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아서 화재 피해를 고스란히 업주들이 감당해야 했죠. 형편이 워낙 안 좋다 보니 별도로 보험 들 형편도 안 돼서 세 번째 불이 났을 때는 전기 공사조차 다시 할 돈이 없었어요. 이웃 가게에서 전기를 끌어다 쓰면서 근근이 버텼는데, 어느 날 상가협의회에서 가게 자리에 대형 마트가 들어설 예정이니 전부 나가라고 하더군요.”
시장에서 함께 장사하던 가게들이 하나 둘 새 둥지를 찾아 떠나는 동안에도 하씨는 끝까지 버텼다. 그대로 물러섰다간 길거리로 나앉을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가게들이 모두 비워지고 하씨의 가게만 남자 보다 못한 상가협의회에서 보상금으로 1백50만원을 제시했다. 그 돈을 받아든 하씨는 수중의 돈 1백50만원을 합쳐 의정부로 왔다.
“가게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인근의 공장들도 월세가 비싸 서울 외곽으로 밀려나고 있었어요. 때마침 저희 가게에서 밥을 대 먹던 신발 공장이 의정부로 이전을 하게 됐는데, 그곳 사장님이 괜찮으면 의정부로 자리를 옮겨 공장 식구들 밥을 계속 해줄 수 있겠느냐고 하시더라고요. 너무 고마웠죠. 그때가 2004년인데 돈 3백만원으로 어디에 가게를 구할 수 있겠어요. 설령 가게를 얻는다 해도 인테리어며 집기 비용이 만만치 않으니 어림도 없는 일이었죠.”
하는 수 없이 의정부의 신발 공장 앞 컨테이너에서 밥을 짓기 시작했다. 그것이 하씨에겐 인생 2막의 출발이었다.
하명숙 씨는 식당 로고와 전화번호가 크게 박힌 마티즈 차량을 타고 배달을 다닌다. 따로 홍보하지 않아도 이 차를 보고 주문 전화가 걸려오도록 한 것이다.
메뉴 선정부터 요리와 배달까지 직접 해
방송에서 소개된 것처럼, 하씨가 하루 평균 배달하는 집밥이 2백50인 분. 집밥으로 올리는 연매출은 3억원에 달한다. 집밥을 판 돈을 모아 7억원 상당의 건물도 샀다. 그간 고생했던 세월을 생각하면 이제는 조금 편히 지낼 법도 하건만 그는 여전히 직접 새벽 장을 보고, 밥과 반찬을 만들고, 손님을 맞는다. 메뉴 선정은 물론 배달까지 직접 한다. 물론 함께하는 직원들도 있고 지난해 결혼한 딸도 수족처럼 일손을 거들고 있지만 그래도 가게에는 사소한 것 하나까지 그의 손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다. 배달은 주로 ‘마티즈’ 승용차로 한다. 흔히 사업을 하다 좀 성공했다 싶으면 멋진 외제차를 뽑아 으스대려고 하지만 하씨에게는 이 배달 차들이 영업용이자 출퇴근용 자가용인 셈이다. 안말쉼터 로고와 전화번호가 크게 박힌 이 마티즈를 타고 다녀야 따로 홍보를 하지 않아도 손님들이 배달 문의를 해온다고 한다.
비결은 또 있다. 그가 가장 자신 있다는, 손수 담근 김치다. 재료는 하씨의 친언니가 시골에서 농사지은 배추며 고춧가루를 가져다 쓴다. 5천원짜리 백반을 시켜 국산 재료로 손수 담근 김치를 맛보기란 아무리 시골이라도 쉽지 않은 일. 갓 지은 밥에 손수 만든 김치와 정갈한 밑반찬, 푸짐한 국, 찌개까지. 배달 음식으로는 도저히 채울 수 없었던 허기를 하씨의 정성스러운 배달 집밥이 채워주고 있는 것이다.
한번 그의 손님이 되면 두말 않고 충성도 높은 고객이 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매주 토요일이면 그는 장사 대신 지역의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나눔 밥상을 준비한다. 6년 전 세상에 둘도 없이 착하던 아들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버리고 실의에 빠져 있던 그에게 숙명처럼 찾아온 일이었다.
“제가 다시 이렇게 밝은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저희 딸 덕분이에요. 자식 먼저 앞세우고, 장사는커녕 집 밖에도 나갈 수가 없었거든요. 그런 저를 보다 못한 딸이 그러더라고요. 엄마 때문에 사는 자기 생각도 좀 해달라고. 그 말을 듣고 나니 정신이 차려지더군요.”
남편이 집을 나간 뒤, 남동생을 위해 대학까지 포기하고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몰래 자판기 커피 재료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모으던 착실한 딸이었다. 앞뒤 돌아볼 새 없이 아등바등하던 그 시절, “늦게까지 돌아다니지 말라”고 매일 혼이 나면서도 엄마가 속상해할까 봐 아르바이트한다는 사실을 숨기던 속 깊은 딸이었다. 딸과 함께 마음을 추스른 그는 인근 동사무소를 찾았다. 지역의 어려운 청소년들과 독거노인들을 돕겠다는 그의 말에 동사무소에서도 기꺼이 다리를 놔줬다. 그렇게 봉사활동을 시작한 것이 햇수로만 6년째다.
기획 · 김지영 기자 | 글 · 김지은 자유기고가 | 사진 · 김성남 기자 | 디자인 · 이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