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정분야에 탐닉… 오타쿠 빗댄 ‘덕후 경제’ 자리잡아
김 씨는 기타를 뺀 다른 것에는 별로 욕심이 없다. 독립하라고 부모가 독촉해도 집에 함께 살고, 소형차를 24개월 할부로 살 정도로 씀씀이가 작다. 김 씨는 “남들은 엉뚱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내가 원하는 소리의 구색을 맞추기 위해 돈을 쓰는 거라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김 씨처럼 특정 분야에 탐닉하면서 관련 제품에 돈을 아끼지 않는 마니아를 일컫는 일본식 오타쿠 문화가 최근 한국에도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분야에 정해진 예산을 몰아서 쓰는 ‘가치소비’가 극단으로 진화한 형태다. 일각에서는 이들의 소비 행태와 관련 시장에 대해 ‘오타쿠’를 누리꾼들이 한국식으로 변형한 말인 ‘덕후’를 붙여 ‘덕후 경제’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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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 마니아인 이승희 씨(33)는 해외에서 열리는 주요 테니스 경기 일정과 자신의 휴가 일정을 맞춰 여행을 떠난다. 이 씨는 “지난해 파리오픈과 상하이오픈을 다녀왔다”며 “회사에서 얻을 수 없는 행복을 다음 경기를 기다리는 데서 찾는다”고 말했다.
최근 통계청에서 발표한 새로운 소비자 유형인 ‘뉴 블루슈머’의 주요 특징도 ‘덕후 경제’에 관한 것이다. ‘관객에서 선수로(스포츠를 보다가 직접 즐기는 것)’ ‘페달족(자전거에 심취한 사람들)’ ‘글로벌 미식가(새로운 맛을 찾아다니는 사람들)’ 등이 대표적이다.
30대가 넘은 이도 적지 않다. 시계 컬렉터 이모 씨(33)는 기계식 시계 마니아다. 그는 주말이면 백화점 시계 매장에 들러 매니저와 한두 시간 동안 새로운 시계에 대한 전문지식을 나눈다. 이미 스위스 시계 공방 투어도 다녀왔다. 한 시계 브랜드 관계자는 “시계 컬렉터들은 경제 수준이 높은 편이지만 시계 외에는 관심이 없어 백화점에서 ‘우수고객(VIP)’으로 분류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국내에 주5일 근무가 자리 잡으면서 개인의 취미생활에 집중할 여유가 생기고, 불확실한 사회 경제 환경 속에서 자신만의 행복을 찾으려는 성향이 강해지면서 ‘덕후 경제’가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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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시대 마니아로 최근 새로 나온 CD를 60장 구매한 김모 씨(35)는 “인터넷 세대인 1990년대 후반 학번부터 자신의 관심사에 몰입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됐다”며 “시간 돈 열정을 쏟는 취미활동은 삶의 원동력이 된다”고 말했다.
○ 롯데백화점에 SM 전용매장 생긴다
‘덕후’ 소비자들을 잡기 위해 유통업계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특정 마니아층을 위한 상품 구색을 늘리는 것이다.
안치우 롯데백화점 바이어가 웹툰 ‘마조 앤 새디’를 보고 발굴한 관련 캐릭터 상품 팝업 스토어는 대박이 났다. 전국에서 웹툰 마니아들이 몰렸고, 지난해 12월 백화점에서 정기모임도 열렸다. 이달 말에 서울 잠실점에 팝업 스토어를 추가로 열 예정이다. 안 매니저는 “다양한 동호회 활동을 하는 색다른 사람들을 만나 아이디어를 찾는 게 일”이라며 “‘덕후’들이 우리를 먹여살린다고 할 정도”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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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마트도 마니아들을 위해 제품군을 더 세분화하고 있다. 이마트에서 글로벌 요리 마니아들을 대상으로 한 수입 조미료는 지난해 전년 대비 33.4% 신장했다.
완구 시장에서도 성인 마니아들의 힘이 커지고 있다. 완구매장인 토이저러스에서 성인들이 많이 찾는 ‘건담’과 같은 조립식 완구의 지난해 매출은 2010년의 3배로 늘었다. 레고와 같은 블록 완구의 매출도 2010년에 비해 5배로 커졌다. 토이저러스를 운영하는 롯데마트 관계자는 “완구 마니아 성인들을 위해 고난도 조립식 완구 제품을 늘리는 중”이라고 말했다.
김현수·권기범 기자 kimh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