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준 객원논설위원·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스스로 구겨버린 정당 민주화
심한 말로 표현하면 민의(民意)의 전당이 돼야 할 국회가 정치 개그 콘서트장으로 전락했다. 정당 민주화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못하면서 경제 민주화를 외치는 ‘용감한 녀석들’이 있다. 민생 안 챙기고, 특권만 누리고, 일하지 않고, 싸움만 하는, 국민이 싫어하는 ‘네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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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조직이 지향하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명확한 규칙과 규범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 둘째, 구성원들에게 조직이 요구하는 성취를 학습하고 연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능력 셋째, 구성원들의 행위에 대해 선별적으로 보상하거나 처벌할 능력이다. 한국 국회가 국민들이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하는 ‘청개구리 국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근본 이유는 바로 이런 능력들을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국회를 생산적으로 운영할 규범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치명적인 한계다. 의회 규범(norm)이란 의회 내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행위 제한을 규정하는 기준이다. 이것은 의원들의 행동을 효과적으로 지배하는 일종의 불문율(不文律·informal rule)이라 할 수 있다. 의회 정치의 제도화는 의회 기능이 활성화, 다변화, 효율화하는 과정인데 이를 위해서는 생산적인 불문율의 발달이 필수적이다.
성숙한 의회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있는 미국 의회는 호혜(互惠)에 관한 불문율, 의원 예의에 관한 불문율, 의원 긍지에 관한 불문율, 의정업무 집중에 관한 불문율 등 수평적이고 생산적인 다양한 불문율을 갖고 있다. 이외에 미국 의원들은 대통령제 아래서 입법부가 존재하는 핵심 이유로 여야가 함께 행정부를 견제해 건강한 정부를 만드는 것이라는 불문율을 목숨처럼 지키려고 한다.
장기판의 ‘졸’처럼 4년 보낼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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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도 놀랍지만 이라크전쟁 당사자이며 재선을 노리는 공화당 출신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는 이런 보고서가 대선을 목전에 두고 공화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됐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이런 결과는 의원들이 당적과 대선에 얽매이지 않고 몇 달 동안 격렬한 논쟁을 벌인 뒤 자신의 소신과 양심에 따라 표결에 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집권당인 미국 공화당의 관점에서 보면 상원 정보위의 발표는 영락없는 해당(害黨) 행위일 것이다. 하지만 의회란 당파적 이익보다 국민만 바라보며 여야가 함께 진실을 규명해 행정부를 견제해야 한다는 대의민주주의 대원칙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은 의원들의 ‘양심선언’이다.
의회가 이 정도는 돼야지 국민으로부터 신뢰받고 의원들도 자긍심을 갖지 않겠는가. 12월 대선을 앞둔 대한민국 국회의 현실은 어떤가. 쇄신을 부르짖고 있는 19대 국회에서도 의원들의 자율성과 책임성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당 지도부의 지시와 통제만이 판을 치고 있다.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국회가 쇄신되기를 바라는 것은 남자가 아이를 낳길 바라는 것과도 같다. 따라서 국회 쇄신의 최우선 과제는 의원들의 불체포 특권 포기가 아니다. 의원들을 마치 장기판의 졸처럼 특정 인물의 입만 쳐다보게 만드는 지시와 통제에 바탕을 둔 수직적이고 비생산적인 불문율을 제거하는 것이다.
19대 국회의원들이여! 그대들은 국민 대표, 자율, 책임과 같은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갖고 국회에 입성했다. 이런 권리를 무시하고 유린하는 인물, 세력에 대해서는 분노하고 저항해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국회 쇄신이 이뤄진다.
김형준 객원논설위원·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joon57@mj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