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의 한국 古선박, 한중 바닷길 교류 생생 증언
펑라이수성의 누각에서 바라본 수문(水門). 왼쪽으로 보이는 물길이 바다와 연결되는 수로로 수문을 나와 곧장 나가면 랴오둥 반도의 남단에 닿는다. 성 안쪽에 보이는 물은 항구로 활용되는 곳으로 한국 고선박은 이곳에서 나왔다.
펑라이수성 안 옛 항구자리 갯벌에서 발굴된 한국 고선박 펑라이 3호(위 사진 앞쪽)와 명대 선박인 펑라이 2호. 한국 고선박은 명대 선박보다 바닥이 평편하고 주로 소나무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펑라이고선박물관에 새로 세워진 포은 정몽주 석상(아래). 박현규 순천향대 교수(왼쪽)와 홍순석 포은학회 부회장(강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이 펑라이를 세 번이나 방문한 포은의 행적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펑라이에는 어떤 역사적 사연이 있기에 약 600년 전의 우리 배가 바다 밑 갯벌에 묻혀 있다가 발견된 것일까.
펑라이수성이 있는 곳은 예로부터 천혜의 항구였다. 나선형으로 꼬인 듯한 해안선이 먼 바다의 높은 파도를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펑라이수성에는 육지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성문과 배를 타고 직접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성문이 모두 갖춰져 있다. 저장(浙江) 성의 동쪽지역이 신라와 고려시대에 한반도와 중국 대륙 중심지를 이어준 교역지라면 펑라이는 신라와 고려는 물론이고 조선시대까지도 한국과 중국을 이어주는 ‘다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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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를 비롯한 많은 재당 신라인들이 산둥의 해안지역에 신라촌을 짓고 동아시아의 해상무역을 장악할 정도로 활발한 해상활동을 전개했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장보고가 세운 신라인의 불교사찰 법화원(法華院)이 대표적인 교류 흔적이다.
신라인 김청(金淸)은 9∼10세기 초반 산둥에 거주하면서 한반도와 저장 성 동쪽 지역을 잇는 삼각무역을 통해 큰 부를 축적했다. 산둥 성 원덩(文登) 시 제스(界石) 진의 사찰 무염선원(无染禪院)에는 김청에 관한 기록이 담긴 ‘당무염선원비’(901년 건립) 일부가 남아 있다. 물자교역으로 큰 부를 축적한 김청이 무염선원을 중창할 때 지역의 유력한 인물로 불탑 건립에 기여를 했기 때문에 남은 기록이다. 그러나 이 비는 여러 개로 쪼개진 채 현재 무염선원이 속해 있는 무염사풍경구 관리원들 숙소의 벽돌로 사용됐다.
펑라이수성을 관리하는 기관인 펑라이거(蓬萊閣)가 5월 18, 19일 개최한 ‘해상 실크로드와 펑라이 고선박 및 등주(登州)항’을 주제로 한 국제학술대회.
항해로는 한반도의 평안도에서 요동 남단 해역과 묘도열도(廟島列島)를 거쳐 산둥의 등주로 가는 길이 주로 이용됐다. 조선시대 항해 기간은 평안도 선사포(宣沙浦)에서 등주까지 통관절차 등을 포함해 약 22일이었다. 통상 4∼6척의 배가 함께 오갔고, 각 선박에는 40∼80명이 탔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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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규 순천향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는 “펑라이에서 발견된 한국 선박은 기록으로 존재하던 한중 교류의 역사를 실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며 “한국 고선박과 정몽주 석상이 함께 전시된 펑라이고선박물관은 관광을 위해 펑라이수성을 찾는 현대의 한국인과 중국인들에게 한중 교류 역사의 깊이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역사적 소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펑라이·원덩=글·사진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