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완규 국제백신연구소 한국후원회 상임고문
게이츠 회장이 왜 우리 대통령에게 IVI에 가 보라고 했을까. 1999년 초 개소한 이래 게이츠 회장은 연구소에 거액을 쾌척했다. 진작 연구소를 유치한 한국은 어느 재력가나 기업체가 속 시원하게 연구를 지원했다는 말을 듣지 못해 서운한 마음이 깔려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 대통령은 덜 성숙한 우리의 기부문화를 빗대며 쑥스러워했을 것이다.
해마다 설사병 등 후진국형 전염병으로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 600만∼700만 명이 목숨을 잃고 있다. 유엔개발계획(UNDP)은 값싼 백신을 개발할 연구소 설립을 추진했다. 1993년 여러 나라가 연구소 유치 경쟁을 벌였다. 치열한 경쟁 끝에 1994년 우리나라가 연구소를 유치했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1995년 유엔 창립 50주년 기념총회 때 “대한민국이 세계 어린이 질병 퇴치를 위해 국제백신연구소를 설립 중이다”고 선언했다.
2000년 초 빌앤드멀린다 게이츠재단은 IVI에 4000만 달러를 쾌척했다. 게이츠 회장은 이어 뎅기열 백신 개발을 위한 연구비로 5500만 달러를 내는 등 오늘까지 약 1억5000만 달러를 지원했다. 물론 한국 정부도 연구소 용지와 건물을 제공했고 해마다 운영비 일부를 지원하고 있다. 연구소는 최근 1달러짜리 경구용 콜레라 백신을 개발했다. 가난한 나라는 40달러라는 콜레라 백신 가격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했으나 값싸고 효능이 월등한 백신 덕에 콜레라로 생명을 잃는 아이의 수를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빌 게이츠 회장은 돈 버는 데 귀재지만 돈 쓰는 데는 더 귀재다”라고 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그런데 게이츠재단 관계자가 “저들이 유치해 놓고 왜 우리에게만 기대려 하는가”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부끄러운 마음을 가누기 힘들었다. 우리가 유치한 연구소 연구비를 게이츠 회장에게만 의존할 수 없다. 갑자기 연구 지원비를 줄이거나 지원을 끊는 상황도 생각해야 한다. 그런 일이 생길 경우 IVI는 더 존립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도 미리 연구소 지원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정부는 정부출연연구소 같이 우리가 유치한 국제백신연구소 연구활동을 책임지고 지원해야 한다. 재력가와 독지가 혹은 기업인은 게이츠 회장처럼 우리가 유치한 국제기구를 돕는 데 귀재가 돼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 자선단체와 국민도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잃는 아이가 없도록 깊은 성찰과 배려가 있어야 한다. 우리 대통령이 게이츠 회장 등 외국 독지가들에게 우리의 성숙한 기부문화를 자랑할 때가 어서 오기를 바란다. 그래서 “고맙소, 빌 게이츠 회장”이 아니라 “고맙소, 대한민국”이란 얘기를 후진국 부모들로부터 듣게 되기를 소망한다.
조완규 국제백신연구소 한국후원회 상임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