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의 개화파’ 꿈꾸는 그들… 모델은 한국, 무기는 한국어
한국 유학을 꿈꾸는 앙가르 씨가 케냐 나이로비의 집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
케냐 수도 나이로비의 낡은 아파트에 사는 제인 망고 앙가르 씨(20·여). 그는 콩나물시루 같은 마타투(중고 승합차를 개조한 미니버스)를 타고 흙먼지를 폴폴 날리며 시내 중심가에 있는 나이로비 세종학당에 간다. 일주일에 두 번 왕복 1시간씩 비좁은 마타투에서 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한국어 노트를 꺼내 단어를 부지런히 외운다. 그는 지난해 9월부터 세종학당에서 무료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간단한 인터뷰를 한국어로 할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최근 찾아간 앙가르 씨의 집에는 옷장과 벽 곳곳에 ‘옷장’ ‘거울’ 등 한국어 단어를 또박또박 써 붙인 메모가 눈에 띄었다. 6.6m²(약 2평) 남짓한 비좁은 방에서 자그마한 나무 책상 하나를 여동생과 나눠 쓰는 앙가르 씨는 아침에 눈뜨자마자 30분, 밤에 잠들기 전 30분씩 규칙적으로 한국어를 자습한다. “낮에는 세종학당에 가거나 TV, 인터넷으로 드라마 ‘주몽’ ‘선덕여왕’을 보면서 공부해요.”
앙가르 씨는 2년 전 고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아프리카 최고 명문인 케냐 나이로비대에 합격했지만 비싼 등록금 때문에 진학을 포기했다. 고교 체육 교사인 아버지의 월급으론 다섯 식구가 먹고살기도 빠듯하다. 절망하던 앙가르 씨에게 희망의 빛이 비쳤다. 세종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우던 친구가 전액 장학금을 받고 한국에 유학 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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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지난해 케냐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994달러에 불과하다. 전후 혼란에서 채 벗어나지 못했던 1960년대 초의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김찬우 주케냐 대사는 “한국이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바뀌고 다수의 글로벌기업을 배출한 것을 보고 케냐인들이 한국의 성공 모델에 큰 관심을 보인다”고 전했다.
나이로비 세종학당의 학생들 대부분은 앙가르 씨처럼 ‘코리안 드림’을 품고 한국어를 배운다. 주로 20대인 이들은 한국의 경제발전 모델을 배워 케냐 발전에 기여하고 싶어 했다. 나이로비대에 재학 중인 엘리트도 있지만 대부분은 앙가르 씨처럼 대학 등록금을 낼 형편이 못돼 고교만 졸업한 젊은이들이다.
심마니 발렌티노 오소로 씨(19)는 “한국의 우수한 정보기술(IT)을 배우고 싶어 서울대나 고려대 컴퓨터공학과에 지원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오소로 씨의 장래 희망은 유엔 나이로비 사무소에서 일하는 컴퓨터 엔지니어다. “아프리카에 중국 기업이 많이 진출했지만 중국어엔 관심 없어요. 한국의 기술력이 훨씬 좋고, 한자보단 한글이 훨씬 배우기 쉽거든요.” 학비가 없어 케냐에서 대학을 못 간 오소로 씨는 “한국어를 배워야 성공할 수 있다”며 웃었다.
케냐 나이로비 세종학당에서 김응수 학당장(가운데 왼쪽에 넥타이 맨 사람)이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그는 끼니를 굶어가며 한국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안타까워 가끔 이들을 자택에 불러 칼국수 김밥 김치전 등을 해 먹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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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10월 현지 한국 기업의 배려로 공간을 지원받고 개인연금을 털어 나이로비에 간판도 없이 한국어교실을 열었다. 알음알음으로 찾아온 학생 8명에게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며 수업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학생이 100명에 이른다. 지난해 9월부터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어세계화재단이 지정 및 지원하는 세종학당 간판을 달았다.
김 학당장은 다른 지역의 세종학당과 달리 장학사업을 병행한다. 한국어를 잘하는 학생을 뽑아 한국 대학에 추천서를 써주고, 합격자에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유학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돕는다. 그가 적극 나서서 한국 대학에 장학금과 기숙사비 지원을 부탁한 결과 지금까지 세종학당 출신 9명이 이화여대 숙명여대 배재대 등의 학부 및 석사 과정으로, 8명이 서울시에서 지원하는 10개월 과정의 기술학교로 유학을 갔다. 나이로비 세종학당에서 무료로 한국어를 가르쳐주고 잘하면 한국 유학도 보내준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수강 희망자가 크게 늘었다. 이제 이곳에 들어오려면 면접시험에서 5 대 1의 경쟁률을 뚫어야 한다.
“장군 되는 것보다 케냐 학생들 공부시키고 한국 문화를 전하는 삶이 훨씬 행복합니다. 케냐의 지도층이 될 똑똑한 학생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고 친한파로 키운다면 아프리카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에도 많은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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