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시인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선생님께서는 신춘문예에 단편소설과 동화가 당선된 작가로 학생들의 문예활동에 관심이 많으셨다. 그런데도 나는 오랫동안 선생님을 찾아뵙지도 않았고 시집 한 권도 보내드리지 않았다. 마흔 중반이 돼서야 선생님을 찾아뵙고 엎드려 절을 올리며 “제가 시를 쓰게 된 것은 다 선생님의 은혜입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조용히 웃으시다가 “그동안 낸 시집 다 사서 읽어봤어요. 더 열심히 노력해서 우리 시단을 빛내는 시를 쓰도록 하세요” 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선생님께서 말씀을 놓지 않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동안 낸 내 시집을 다 사서 읽으셨다는 말씀에 더욱 놀라 죄인이 된 심정이었다.
시인의 길 이끌어준 세 분의 스승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내 까까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선생님의 그 두툼한 칭찬의 손의 온기를 나는 아직 잊지 못한다. 나를 칭찬하시면서 ‘열심히 노력한다면’이라는 전제 조건을 다셨다는 것 또한 잊은 적이 없다. 시를 쓰는 일도 노력하는 일이라는 것을 선생님께서는 일찍이 내게 가르쳐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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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전국 각 대학에서 열리는 백일장에도 일일이 차비까지 마련해 주시면서 나가게 해주셨다. 입상해 상을 타오면 꼭 전교생이 모이는 조회시간에 다시 시상식을 하고 격려해 주셨는데 선생님의 사랑이 얼마나 섬세하고 자상했는지 이제야 깨닫는다. 무엇보다도 선생님은 일제강점기 때 이육사 이상화 시인이 ‘대륜’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는 이야기를 늘 해주심으로써 두 분 시인의 민족적 정신과 기개가 내 시 정신의 바탕이 되도록 일깨워주셨다.
또 한 분 나의 스승은 당시 경희대 국문과에 재직 중이시던 문학평론가 김우종(金宇鍾) 선생님이시다. 선생님은 경희대 주최 ‘전국 고교생 문예현상 모집’에 응모한 내 평론 원고를 읽고 고심이 많으셨다. 분명 고등학생이 쓴 작품인데 ‘고교문예의 성찰-고교 시를 중심으로’라는 제목 글씨가 어른 필체였기 때문이다. 필체 좋은 아버지한테 일부러 부탁해 그렇게 했는데 심사위원 입장에서는 원고 전체를 어른이 써준 게 아닐까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그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으셨다. 아마 선생님께서 끝내 의구심을 가지셨다면 나는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없었을 것이다.
김우종 선생님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가난한 자취생인 나를 집으로 데려가 고봉밥을 먹게 해주셨다. 나 대신 휴학계를 제출해 주시기도 했으며, 신병 훈련을 받고 이동 중에 잠깐 인사차 들르자 문학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말라는 뜻으로 ‘현대문학’ 한 권을 건네주셨다. 그런데 그 속에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들어 있어 춘천 보충대로 가는 기차 안에서 이등병인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제자 잘되기만 바라는 사랑이란
지금 내 인생에는 이 세 분 스승이 존재하고 계셔 더 이상 가난하지도 쓸쓸하지도 않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스승은 부모와 같다. 스승의 사랑도 모성처럼 무조건적이어서 오직 제자가 잘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올 연초에 이성수 선생님께서는 내게 정진하라는 새해 편지를 주시고, 김우종 선생님께서는 청사초롱이 겨울 나뭇가지에 매달려 환히 불을 밝히는 유화 한 점을 그려 보내주셨다. 그렇지만 제자인 나는 아직 답신도 못 드렸다. 찾아뵈어야지 생각만 하다가 시간만 보내고 말았다. 이렇게 못난 제자는 못난 자식과 같다. 그래도 이런 제자를 사랑해주시니 이 은혜 평생 다 갚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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