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아이러니랄까. 흥미로운 사실은 1986년 구소련의 체르노빌 원전 폭발사고 때는 미국 와인, 특히 워싱턴 주 와인이 이 사고 덕에 단숨에 유럽인들에게 알려졌다는 점이다. 당시 체르노빌 원전에서 유출된 방사성 물질은 바람을 타고 서유럽까지 날아갔다. 당연히 유럽 전역에서 생산된 모든 먹을거리의 안전에 비상이 걸렸다. 와인도 예외는 아니어서 관련 기관의 철저한 검역이 이뤄졌다. 다행히 와인을 포함한 대부분의 먹을거리는 안전하다는 판정을 받았지만 유럽인들의 불안감은 팽배했다.
프랑스는 방사능 오염의 위험성이 유럽의 다른 어떤 나라보다 낮았지만 스웨덴에서는 당시 판매되던 레드 와인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프랑스산 와인 기피 현상이 심각했다. 이 같은 현상이 지속되자 스웨덴 주류공사는 전 세계의 네트워크를 동원해서 프랑스 와인을 대신할, 방사능에 오염되지 않은 지역에서 생산되는 보르도 스타일의 레드 와인을 물색했다. 이 소식은 당시 대만에서 워싱턴산 와인 판매에 고군분투하고 있던 워싱턴 주 출신의 톰 헤지스에게도 전해졌다. 그는 급히 워싱턴 주에서 생산된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를 사들여 직접 병에 넣고는 급한 대로 자신의 성인 ‘헤지스’를 라벨에 새겨 스웨덴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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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영국 모 언론의 기사를 읽다 보니 체르노빌 사고 당시 구소련 정부가 자국민에게 레드 와인(‘레스베라트롤’이라는 항산화 성분이 방사능 피해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있음) 섭취를 적극 권장했다고 한다. 또한 1994년 5월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했을 때에도 러시아 정부가 사고지역 인근의 군부대 장교에게 드라이 레드 와인을 추가로 배급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와인 그까짓 게 얼마나 도움이 되겠어?’ 하다가도 쉽게 무시하기에는 마음이 개운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와인에 이런 효능도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엄청난 원전 재앙이 발생하지 않아서 이런 사실이 굳이 밝혀지지 않아도 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 본다. 후쿠시마 원전으로 인한 더 이상의 피해가 없기를, 일본인들이 대지진의 피해를 딛고 빠르게 회복하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한다.
김혜주 와인칼럼니스트
샤토 팔메르 1996
특별한 날이라 와인을 오픈하는 때도 있고, 특별한 와인을 오픈해서 그날이 특별한 날로 기억될 때도 있다. 이번에 소개하는 와인은 필자가 대학 은사님들과의 저녁식사 자리에 가지고 가려고 골라놓은 와인이다. 1996년이 필자가 대학을 졸업한 해라는 상징성도 있다. 비록 3등급이지만 한 번이라도 맛을 본 애호가들에게는 늘 1등급 못지않은 대접을 받는 와인이다. 어느 빈티지를 마셔도 ‘과연’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무릇 와인도, 사람도 이런 한결같음이 중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