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이팝의 확산은 일본의 오판과 중국의 영향력 때문에 가능● 문화 비즈니스란 문화상품 세일즈에서 공간영역으로 확장해야…
"1990년대 후반만 해도 우리(기자나 평론가들)는 현장을 몰랐기 때문에 SM의 이수만 대표를 보고 비웃기도 했어요(웃음). 그런데 이 대표는 'HOT'에 열광하는 중국과 동남아의 수만 명의 10대 팬들을 직접 접했기에 '아시아 시장을 제패한다'는 원대한 꿈을 일찌감치부터 꿀 수 있었고, 실제 현실로 만들어낸 거지요…."
남산 자락에 위치한 문화공간 '와지트'에서 만난 음악평론가 강헌(49)은 최근의 케이팝 열풍에 대한 얘기를 1990년대 후반 SM엔터테인먼트 이수만 대표의 회상으로 시작했다.
지금은 당연시 되는 '한국가요의 아시아 제패'라는 타이틀마저 10년 전만 해도 쉽게 꿈꾸지 못한 환상의 영역이었다는 얘기다. 실제 수차례의 경영난을 겪었던 이수만 대표는 이후 아시아 시장의 성공과 함께 최고의 연예기획자로 거듭나며 일종의 케이팝 아이돌 산업의 선구자로 부각됐다. 그를 모방한 수많은 제 2의 이수만이 탄생했고 그와 더불어 한국 대중가요가 아시아 전역에서 인기를 끌며 한류 상품의 대표 상품으로 떠올랐다.
광고 로드중
당초 아시아 시장을 장악했던 중국과 일본세를 뿌리친 한류의 급성장은 21세기 중차대한 문화적 사건이다.(연합뉴스)
■ 한국 대중가요의 가치를 가장 먼저 인식한 평론가
그로 인해 당시 대중들에게 소외됐던 김현식과 김광석이 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고 서태지는 단순히 '10대의 아이콘'이 아니라 '문화대통령'으로 승격할 수 있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까지 가요계와 영화계를 두루 주유했던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잠시 현장에서 멀어지기도 했지만 다시 문화계로 복귀해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그 누구도 꿈꾸지 못한 신한류 시장을 개척한 한류기획자들의 이야기를 기억할만한 사람으로 그만한 인물도 흔치 않았다. 그러나 복잡다단한 한국 가요사 뒷이야기 보다 그는 케이팝이 가능했던 구조적인 배경의 설명에 보다 집중했다. 한국의 대표 음악평론가가 바라보는 케이팝 성공의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 한국의 가요, 특히 댄스팝이 아시아 음반 시장의 주류가 됐습니다.
광고 로드중
- 영화나 드라마도 한 때 인기 있었는데 왜 하필 한국가요가 아시아에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을까요?
"아주 중요한 질문인데, 실제 예전엔 누구라도 음악의 세계화는 쉽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본질적으로 영상시장은 언어가 부차적이에요. 더빙이나 자막으로 보완이 가능하잖아요. 그러다 보니 할리우드 영화가 전 세계를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음악이란 언어가 대단히 중요하거든요. 당장 팝송만 해도 영어권 출신이 아니면 따라 부르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래서 음악만큼은 다국적 기업이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렵다는 게 정설이었어요."
- 그런데 댄스팝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뜻인가요?
"맞습니다. 댄스팝이란 장르가 언어적인 영향력이 덜한 장르에요. 따라 부르기 쉽죠. 조용필과 조동진이라면 가사에 담긴 스토리가 중요하겠지만 댄스팝은 춤과 외모 등 시각적인 요소가 훨씬 더 중요하거든요. 실제 한국가수가 중국어나 태국어로 현지 진출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한국어와 가장 가까운 일본어로 불러도 현지인에게는 어색하게 들리는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음악컨텐츠를 영상컨텐츠로 바꾸는 혁신으로 이런 대성공이 가능해진 거지요. 요즘 다들 유튜브로 노래 접하잖아요."
광고 로드중
음악평론가 강헌(오른쪽)은 일찍부터 한국대중가요의 가능성을 파악한 인물이다.(동아일보 DB)
■ 노래를 비주얼로 변화시킨 한류기획자들의 명민함
- 실제 해외 케이팝 팬들은 스타들의 비주얼적인 요소에 압도된다고 말하더군요. 그 영향도 있었겠지만 한류의 확산에는 다른 경제적인 요인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긴 했지요. 경제성장을 추진하면서 한국모델을 받아들인 것도 요인이 됐겠지요. 한국 이미지가 긍정적이긴 하니까요. 아시아 시장이 급속하게 개혁 개방화 되면서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시장이 생긴 것이지요."
- 그게 어떤 것인가요?
"바로 '아시아 10대 시장'의 탄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틴에이저'라는 것도 사실 경제적 뒷받침이 없으면 존립이 불가능합니다. 우리나라도 1970년대에는 학생들에게 용돈이라는 개념이 없었어요. 교통비과 간식비 정도가 전부였잖아요. 그러다가 1980년대 경제호황과 함께 부동산 버블이 생기는 등 사회의 부가 증가했고 그 일부가 자연스럽게 10대 자녀들에게 흘러간 것이죠. 그 용돈이 바로 10대들의 독자문화를 만드는 기초가 되지요. 동일한 현상이 아시아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1980년대 대중문화의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다름 아닌 일본 소니사의 '워크맨'의 등장으로 요약 가능하다. 당시 가족끼리 공동으로 사용하던 레코더를 개인이 소비할 수 있게 되면서 드디어 10대가 자신이 원하는 가수의 음악을 선택할 수 있게 됐다는 얘기다. 그 결과 한국의 대중가요도 부쩍 성장해 팝송과 일본의 제이팝을 물리칠 경제적 근거를 마련하게 됐다는 설명이었다.
- 중국과 아시아에서도 같은 현상이 반복됐는데 마침 한국 컨텐츠가 인터넷을 타고 무한 전파된 것이군요.
"맞습니다. 개인화됐고 서구화된 아시아 10대 젊은이의 눈높이에 맞는 컨텐츠는 자국에는 당연히 없고 중국은 불가능했던 것이에요. 일본은 컨텐츠는 있었는데 딱히 아시아 시장에 관심이 없었죠. 그게 한국에는 큰 행운이었죠."
한국 대중음악의 격을 한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 대중음악평론가 강헌(동아일보 자료사진)
■ "아시아 시장을 경시한 일본의 실패를 반복하지 말아야"
- 그게 가장 놀라운 현상인데요, 어째서 일본은 아시아 문화시장을 경시했을까요?
"아시아 시장이 이렇게 빨리 획기적인 성장을 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한 거죠. 게다가 내수시장이 워낙 크니 아시아 시장은 경시됐습니다. 일례로 전자시장만 해도 소니나 마쓰시타 같은 초거대 재벌은 전쟁과도 같은 내수싸움에 몰입해야 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일본 기업에서 승진하려면 무조건 미국과 유럽시장을 가야 했어요. 동남아 시장은 한마디로 좌천이라는 의미였습니다. 1990년대 아시아 문화시장이라고 해봐야 일본의 현(懸) 두세 개 규모였고 더구나 저작권 보호도 받지 못했습니다. 일본이 아시아 시장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던 것이죠."
- 한국이 운이 좋은 편이군요.
"그렇습니다. 일본의 판단 착오도 결정적이었지만 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죠. 1990년대 중반까지 동남아를 지배한 컨텐츠는 사실 중국 컨텐츠였어요. 거의 모두가 중국이나 홍콩 등의 컨텐츠를 소비하고 있었어요. 아무리 종교와 민족이 달랐지만 할리우드 컨텐츠는 거리가 느껴졌고 자국의 생산 시스템은 약했기 때문에 TV에 중국인들이 자주 나왔던 거지요. 그런데 이 점도 한류 확산에 큰 도움이 됐어요. 한국 사람들은 중국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데도 오히려 품질은 훨씬 높았던 거지요. 그 덕에 손쉽게 동남아 시장을 우리가 접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중국과 일본의 덕을 완전히 본거에요. 우리의 의도와 무관하게 한류붐을 맞이하게 된 거죠."
- 적극적인 현지화 전략도 큰 힘이 되었지요.
"우리는 도전적으로 해외 시장을 개척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내수 규모가 워낙 작아 해외에서 무조선 성공해야 했으니까요. 저작권 보호를 받지 못해도 무조건 '해외로! 해외로!'가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노하우가 쌓이면서 현지 시장상황에 맞게 기민하게 대응할 수가 있었던 거지요."
그의 최근 고민은 음악과 영화뿐만 아니라 한국요리, 문화의 세계화에 집중돼 있다. 한식의 세계화가 이뤄져야 진정한 한류의 확산이 정착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 왜 요리문화인가요?
"저는 한식 세계화에 대해서 조금 다른 생각을 갖고 있어요. 떡볶이나 비빔밥을 광고하는 것은 절대 한식을 위하는 길이 아니에요."
- 그럼 무엇을 팔아야 하나요?
"문화란 상품 그 자체를 파는 게 아니라 절대적으로 '공간'을 팔아야 합니다. 태국 얘기를 해드릴까요? 뉴욕 런던 파리 등 세계 주요 도시의 가장 비싼 거리에 가보면 최고급 태국 레스토랑이 있습니다. 태국 음식을 소비하면서 동시에 태국 자체를 소비하는 것이죠. 태국은 이미 1990년대에 레스토랑만으로 전 세계에 태국의 문화 브랜드를 확립했어요. 요리뿐만 아니라 문화도 마찬가지에요. 이제는 공간을 팔 수 있는 치밀한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 오·감·만·족 O₂는 동아일보가 만드는 대중문화 전문 웹진입니다. 동아닷컴에서 만나는 오·감·만·족 O₂!(news.donga.com/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