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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금 대신 정기예금” 고환율 시대가 바꿔놓은 사회상

입력 | 2008-11-30 19:14:00


2년 전부터 매달 국내에서 번 돈 80만 원을 본국에 송금해 온 중국동포 Y(22) 씨는 최근 송금을 중단하고 대신 시중은행의 정기예금에 가입했다. 나중에 환율이 내리면 그동안 모아놓은 원화 봉급을 한꺼번에 송금할 생각이다.

최근 환율 급등으로 국내에서 땀 흘려 일해 벌어들인 돈을 본국에 보낼 때 위안화로 환산한 송금액이 확 줄어들기 때문. 만약 한국에서 100만 원을 송금하면 중국 현지인의 한달 월급에 버금가는 1500~2000위안씩 손해를 보는 꼴이다.

외환은행 김선규 부장은 "동남아 파키스탄 출신 외국인근로자가 많은 안산이나 반월 지점에서 외국인의 본국 송금액이 평소에 비해 30%는 줄었다"고 말했다.

원-달러 환율이 지난주 1500원대까지 치솟으면서 원화가치 하락으로 인한 다양한 현상들이 사회 각 부문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김포공항에 신혼부부들 붐벼

10월 중순 결혼식을 올린 이모(33) 씨 부부는 신혼여행으로 목포와 부산, 강릉을 잇는 해안도로를 따라 일주일 간 드라이브를 다녀왔다. 이 씨는 "남들은 일생에 한 번 있는 여행인 만큼 해외로 나가라고 했지만 환율 상승과 유가 하락 때문에 국내 자동차 여행이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했다.

롯데관광여행사에 따르면 10월부터 최근까지 제주도 여행에 대한 문의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0~30% 가량 늘었다. 신혼부부들의 발길이 거의 끊겼던 김포공항에도 최근 주말마다 꽃장식을 한 승용차들이 자주 눈에 띄고 있다.

동남아나 중국 골프여행을 떠났던 사람들은 최근 남해안 주변으로 몰리고 있다. 여수나 순천 등지 골프장은 그린피가 10만 원 대 초반으로 해외는 물론이고 수도권보다도 훨씬 저렴하다.

회사원 오모(29) 씨는 "올 초에 연말 가족여행으로 사이판에 있는 리조트를 예약했지만 최근 환율이 너무 올라 취소했다"며 "대신 국내 리조트를 찾아봤지만 대기자가 많아 예약을 못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방학 때 연구활동을 위해 1~2개월 씩 외국에서 시간을 보내던 대학교수들도 이번 겨울방학만큼은 국내에서 지내는 사례가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수도권 소재 K대학의 한 공과대학 교수는 "방문교수나 실험 목적으로 단기간 해외에 체류하는 경우는 물론이고 6개월 이상 안식년을 맞아 외국으로 가던 교수들도 최근 환율흐름에 적잖이 당황해하고 있다"고 전했다.

●해외 면세점엔 한국어 실종

올 9,10월 롯데백화점 전체 점포와 명품관인 '애비뉴엘'의 명품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40%대의 성장을 했다. 그동안 소비자들이 주로 면세점에서 구입했던 명품들을 이제는 국내 백화점에서 사기 때문이다. 이 백화점 관계자는 "백화점은 환율이 오른다고 바로 가격에 반영되지 않기 때문에 최근에는 백화점이 면세점보다 싼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거꾸로 한국인 쇼핑객들로 붐볐던 해외공항 면세점에선 급등한 환율 때문에 한국어를 좀처럼 듣기가 힘들다. 해외에 체류하는 한국인 여행 가이드들도 손님이 급감해 울상이다.

1~2년 전 엔저(円低) 시대 때 큰 인기를 끌었던 일본 상품들은 외면을 받고 있다.

지난해 서울 중구에서 개업한 S일식주점의 메뉴판에선 겟케이칸(月桂冠), 오코토야마(男山) 등 10여 가지 일본 수입 청주를 볼 수 있지만 이 가운데 절반 정도는 주문해도 재고가 없다. 청주 수입가격이 뛰면서 도매상들이 아예 수입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최근 인터넷 쇼핑몰에서 한국산 기저귀는 일본산에 비해 개당 100원 가까이 싸다. 주부 정모(33) 씨는 "그래도 일본산 기저귀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는 주부들은 엔화가 계속 오를 것에 대비해 아예 여러 팩을 사재기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유학을 준비하고 있는 은행원 이모(30) 씨는 환율 상승으로 토플(TOEFL) 시험 응시를 미루고 있다. 요즘 관련 인터넷 카페에도 응시료가 너무 올랐다고 불평하는 글이 적지 않다.

유재동기자 jarrett@donga.com

박용기자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