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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운곳 긁어주는 이런 法 못만드나요

입력 | 2005-12-05 03:00:00



“희귀성 척추질환을 앓고 있는 청년들이 군대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올해 초 강직성척추염 환자로 목을 잘 움직이지 못하는 문모(29) 씨가 장애인인 열린우리당 장향숙(張香淑) 의원 사무실을 찾아왔다.

문 씨는 “강직성척추염은 당장 증세가 드러나지 않더라도 지속적으로 치료하지 않으면 나중에 척추가 마비된다”며 “군 복무를 하게 되면 증세가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호소했다.

문 씨의 청원은 장 의원의 소개로 곧 국회 국방위원회에 상정됐다. ‘징병신체검사 규칙 개정 청원’이라는 이름으로 전문위원의 검토를 거쳐 처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처럼 국민이 “법을 만들어(바꿔) 달라”며 17대 국회에 낸 입법 청원은 모두 252건에 이른다. 상당수가 민생 현장에서 나온 고민과 하소연을 담고 있다.

▽“법을 만들어 주세요”=252건의 청원 중 4일 현재까지 계류돼 있는 청원은 모두 199건. 이중 개인이나 단체의 호소나 신원(伸寃), 지역구 현안 등 민원성 내용이 90여 건으로 가장 많다.

청각장애인인 김모 씨는 시각장애인인 한나라당 정화원(鄭和元) 의원의 소개로 “선거유세 때 수화 통역을 해 달라”는 내용의 선거법 개정 청원안을 내놨다. 탈북자 김모 씨는 “북한에서의 한의사 경력을 인정해 한의사 국가시험을 보게 해 달라”고 청원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난 뒤 지난달 말에는 “휴대전화와 MP3 플레이어를 소지했다가 부정행위자로 몰린 학생들을 구제해 달라”는 ‘고등교육법 개정 청원’이 접수되기도 했다.

특정 구간에 고속도로를 놓아 달라거나 해안 철조망을 개방해 뺑 돌아다니는 거리를 줄여 달라는 등의 지역 민원도 적지 않다.

정치 경제 사회 현안과 관련된 내용은 80여 건. 부패방지법이나 금융거래법, 국회법, 사면법을 개정해 달라는 청원 등 각계 전문가 차원에서 낸 것이 상당수다.

이어 특정 단체나 그룹과 이해관계가 얽힌 청원도 10여 건에 이른다.

전국의 서예 교사와 동호인 5만2000여 명은 ‘서예의 초중고교 과목 편성’을 공동 청원했다. 미용업계 종사자인 박모 씨는 “업무 연관성이 큰 피부미용과 머리미용의 자격증을 분리하지 말아 달라”고 청원했다.

▽기발한 아이디어도 속출=청원에는 국회의원들도 생각하지 못했던 기발한 아이디어도 많다.

김모 씨는 새 화폐 도안에 조선시대 과학자인 장영실(蔣英實)의 초상을 채택해 달라고 청원했다. 과학의 중요성을 화폐에도 담아야 한다는 것이 취지.

한나라당 박세환(朴世煥) 의원이 소개한 병역법 개정 청원에는 “진정한 남녀평등 실현을 위해 여성의 군 복무를 의무화해 달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 밖에 2만여 명이 서명한 ‘광주, 전남 통합을 위한 법’ 제정 청원, 지난해 로버트 김 후원회장이었던 이웅진 씨가 “김 씨에게 ‘조국을 사랑한 한국인’ 호칭을 부여해 달라”며 낸 청원도 있다.

2일에는 ‘학생의 날’ 명칭을 ‘학생독립운동 기념일’로 바꿔 달라는 청원이 국회 행정자치위원회를 통과했다. 일제 탄압에 맞섰던 광주학생항일운동을 기리는 취지가 잊혀졌다는 이유에서다.

국회의 한 입법조사관은 “국회의원들은 이념 논쟁이나 정쟁 소지가 있는 법안 싸움에 정신을 뺏기고 있지만 정작 국민이 원하는 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줄 소박하고 작은 법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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