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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선비론(19)]寧齋 이건창

입력 | 1998-02-19 20:05:00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浪人)의 손에 시해되고 시신이 불태워지는 처참한 변고가 있은 뒤 친일내각이 구성되고 국왕은 왕비를 폐한다는 조칙을 내렸다. 1895년 음력8월20일 그 사변이 있고 나서 달이 바뀌었어도 상복을 걸치는 사람이 아무도 없자 강화도 큰사골 집에 칩거하던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1852∼1898)은 홍승헌(洪承憲) 정원용(鄭元容)과 함께 궐하에 엎디어 폐비의 칙명을 거두고 죄인을 잡아 처형하라고 주장하였다. 강한 이웃을 두려워하여 왕비의 상도 치르지 못하는 우리 조정이 못내 한심했던 것이다. 이보다 더한 변고가 있다면 그것은 조국의 멸망이다. 9월5일 이건창은 이렇게 ‘청토복소(請討復疏)’의 상소문을 올렸으나 고종의 눈을 거치지 않고 반송되었다. 13일에 다시 올렸으나 역시 내각에 의해 내쳐졌다. 그러나 그의 상소를 전후하여 민심은 하나로 합해졌고 의병들도 일어났다. 이건창은 청나라 리훙장(李鴻章)이 개국을 주선할 때 이미 “스스로 지키는 것 없이 그 자만 믿는다면 나중에 반드시 나라가 팔리고 말리라”고 시정소문(時政疏文)을 지어 우려하였다. 수호통상(修好通商)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다. 개항을 하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려면 그 방법을 허(虛)가 아니라 실(實)에서, 이웃나라가 아닌 아(我)에게서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논리에 동조하지 않았고 허명으로만 개화를 외치는 시류배의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이건창은 불의와 부정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다. 스물여섯의 젊은 나이로 충청우도 안렴사(忠淸右道 按廉使), 말하자면 암행어사가 되었을 때 충청우도 감사 조아무개의 은닉 재물을 찾아내고 숱한 비행을 밝혀냈으며 그의 행동을 과민하다고 의심하는 국왕 고종 앞에서 탐관의 만행을 조목조목 낱낱이 알렸다. 서른두살에 경기도 안렴사가 되었을 때는 연안 13개 고을을 진휼(賑恤)하고 광주 수원 개성의 세금을 실정에 맞게 덜어주었다. 서울 부시장격인 한성소윤(漢城少尹)으로 있을 때는 외국사람이 가옥과 토지를 범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그 때문에 청나라 공사의 간섭으로 자리에서 내쫓기기도 했다. 함경도 안핵사로 나가서는 그곳 감사의 비행을 낱낱이 밝혀 파면시켰다. ‘지방관이 올바른 행정을 하지 않으면 이건창이 찾아간다’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이건창은 법률의 문구만을 좇는 도필리(刀筆吏·아전을 얕잡아 일컫는 말)가 아니었다.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지만 글귀나 아로새기는 조고가(문필가)로 그치지 않았다. ‘참된 도리(實理)’를 내심에서 파악하여 ‘참된 일(實事)’을 실천하려는 강화학(江華學)의 전통을 이어받은 인물이었다. 남의 아픔을 내 고통으로 느끼는 그의 마음가짐은 양명학자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 이후로 강화학이 지켜왔던 실천내용이었다. 또한 일의 성패가 문제가 아니라 동기의 순수성 여부가 문제일 따름이라는 것은 조부 이시원(李是遠)의 가르침이었다. 충청우도를 암행할 때 죄인을 신문하고 쓴 시 (녹수작·錄囚作)에서 이건창은 ‘피맺히는 고통을 모르고 돈 먹는 달콤함만 말하다니 너희들도 사람이거늘 살가죽이 어찌 견디랴’라 하고 ‘채찍 하나 회초리 하나에도 혹 상해 죽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차라리 관대하다는 잘못이 있을망정 내 마음은 본디 이와 같도다’라고 하여 탐욕에 눈먼 인간의 모습에 가슴 아파하고 측은해 하였다. 그 시기에 태안반도의 안흥에서 수군(水軍)과 어촌의 실상을 기술한 시와 모진 흉년에 관교들의 횡포로 초주검이 된 산골 사람을 그린 시, 경기도 안렴사로 있으면서 환곡(還穀·농민들에게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받아들이는 제도)의 문란과 농민의 고통을 목도하고 쓴 시, 황해도 관찰사로 가다가 연평도 조기잡이의 삶을 노래한 시 등은 우리나라 사실주의 문학의 높은 봉우리를 이루었다. 기층민의 애환에 동정하고 조국의 자주적 부강을 염원하는 뜻에서 나왔기에 그 말이 절실하고 그 사상이 온화하면서도 강건했다. 그는 결코 문학가로 자처하지 않았지만 그의 산문은 구한말의 문학가인 김택영(金澤榮)이 고려 조선의 대문장가 아홉을 꼽은 선집에 최후의 인물로 선별되어 있다. 1898년 귀양지인 고군산도에서 돌아와 마흔일곱의 짧은 생을 마친 뒤에도 그의 시문은 매천 황현(梅泉 黃玹)을 비롯한 여러 불꽃같은 지식인들의 손으로 베껴져 전하다가 1917년 중국에서 ‘명미당집(明美堂集)’으로 간행되었다. 이건창은 당색(黨色)의 제한 때문에 그의 정치 이념을 제대로 구현할 수 없었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앞에서 국론이 통일되지 못하는데는 붕당정치에 일부 원인이 있다고 한 그는 ‘당의통략(黨議通略)’을 집필하였다. 윗대의 이긍익(李肯翊)이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을 엮었던 사학 연구의 맥을 이은 것이기도 하다. 이건창의 자는 봉조(鳳鳥 혹은 鳳藻), 호는 영재이다. 1852년에 태어났고 죽은 해는 1898년 광무(光武) 2년이다. 당호(堂號)는 조부가 병인양요때 순국하면서 남긴, 시대의 소임을 다하라는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명미당(明美堂)이라 하였다. 노성인(老成人·노련하고 성숙한 사람)은 갔어도 그 전형은 남았다. 아우 이건승(李建昇)은 을사조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된 뒤 강화도 사기리에 남아 계명의숙(啓明義塾)을 설립하여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다가 경술국치를 당하자 만저우(滿洲)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이건창이 굳게 지켜낸 강화학의 정신과 민족자주이념은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에게 계승되어 큰 줄기를 이루었다. 심경호(고려대교수·한문학) [약력] △서울대 국문학과 졸업 △일본 교토대에서 박사학위 △저서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 ‘한시로 엮은 한국사기행’ ‘다산과 춘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