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0년 한국동란(6.25) 직전인 6월12일 발효된 한국은행법은 숱한 진통을 겪어왔다. 이번까지 합해 크게 네차례의 한은법파동을 치렀다. ▼1차〓이철희―장영자 어음사기사건 후 83년 5월 은행감독원을 한은에서 분리하는 등의 금융감독체계 개편방안을 정부가 금융산업발전심의회에 부의했으나 대다수 위원 반대로 철회했다. 이에 앞서 63년3월 은행감독원의 정부이관이 주내용인 개정안이 마련돼 금통위에 자문했으나 금통위에서 반대해 좌절됐다. 68년과 77년에도은감원과관련한마찰이 있었다. ▼2차〓노태우(盧泰愚) 당시 민정당 대표의 「6.29 선언」 직후인 87년7월 한은 직원들의 「독립선언」으로 시작된 2차 파동은 2년을 넘게 끌었다. 대선에 임한 각 정당은 「중앙은행 독립」을 한결같이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다. 88년 여소야대 13대 국회개원 후 야3당과 여당은 독자적 개정안을 냈다. 그러나 한은은 개정안이 독립성확보에 크게 미흡하다며 가두에서 1백만명 서명운동에 들어갔다. 89년 당시 재무부와 한은은 실무협의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은행감독원 분리 △통화신용정책의 사전협의 범위 등에 대해 의견이 엇갈렸다. 결국 금융통화운영위원회가 『장기과제로 넘기자』고 주장했고 국회도 같은 해 11월 「없었던 일」로 했다. ▼3차〓95년2월 재경원이 △은감원 분리 △금융감독원 통합을 뼈대로 한은법 개정안을 전격발표하면서 불이 붙었다. 재경원은 법안 발표 닷새만에 국무회의에서 법안을 통과시켰다. 사흘 후에는 국회에 제출했다. 한은은 노조는 물론 총재 임원 부서장들도 반대입장을 밝혔다. 당시 「6.27 지방선거」를 앞둔 여권내에서 먼저 유보론이 대두했고 14대 국회가 끝나면서 자동폐기됐다. ▼4차〓이번 중앙은행 및 금융감독체계 개편논란은 「제4차 한은법 파동」으로 기록될 예정. 이경식(李經植)한은총재가 정부안에 합의한 것이 종전과 다른 양상. 모두 대선 등 정치일정에 임박해 소모전으로 끝났다는 점이 공통된다. 〈윤희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