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영국이 선택한 정치적 변화는 참으로 용기있는 것이었다. 18년 집권의 보수당 대신 노동당에 정권을 쥐어준 것이다. 용기는 지혜를 바탕으로 한다. 영국인들에게는 보수당의 공과(功過)를 꿰뚫어보는 혜안이 있었다. 메이저총리의 영국경제는 표면상 실업률이 낮아지고 인플레이션도 진정됐으며 국제수지도 나쁘지 않아 대처리즘이 승리한듯이 보였다. 하지만 안으로는 문제가 많았다. 제조업이 약화되면서 경제기반이 부실해졌고 소득불균형은 사회의 조화를 해쳤다. 또한 대학예산의 대폭절감은 인적자원 배양을 더디게 해 미래의 생산능력을 위축시켰다. ▼ 「반성문」없는 여야 ▼ 이런 현실을 직시하고 영국이 가야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토니 블레어가 선택됐고,그는 집권하자마자 오랫동안 구상해온 금융개혁 교육개혁 지역주의 타파를 의욕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정치상은 어떤가. 7룡이라는 이들은 신한국당후보가 바로 대통령인듯 경선승리를 위해 특정지역 영구집권론 제기,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찬양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지난 4년여동안 사회와 경제기반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은 여당의 정권재창출이란 상식에 비춰 납득하기 어렵다. YS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거나 김영삼정부에서 요직을 지낸 이들은 4년여의 어두운 시대에 대해 직간접적 책임을 통감한다는 반성문이라도 쓰고 출사표를 던져야 하지 않았을까. 야당도 부끄러움이 없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실명제는 실명(失明)돼 투명한 사회건설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사채시장을 억눌러 중소상공인들을 극심한 어려움에 빠뜨렸고, 국제경쟁력은 추락한 가운데 재벌그룹기업과 여타기업 간의 골이 깊어가는 와중에 어떤 대안을 내놓았는가. 여야를 막론하고 우뚝 솟은 지도자가 없이 도토리키재기식 정치게임이 벌어지는 이유는 정치가들에게 비전이 없기 때문이다. 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감각이 없다는 말이다. 솔로몬은 구약 잠언서에서 지도자가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민족은 망한다고 경고했다. 이 경구가 요즘처럼 가슴에 와닿은 적은 없었다. 산산조각난 사회를 재건하고 구렁텅이로 빠져든 경제를 소생시킬 비전과 그것을 토대로 한 통치능력이 아쉽다. ▼ 경제난등 현실 파악을 ▼ 비전확립에는 건전한 정치철학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철저한 현실파악이 선행돼야 한다. 경제를 예로 들어보자. 최근 몇개의 대기업집단이 부도를 냈고, 크고 작은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어왔다. 이것이 경기순환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라는데는 이미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런데도 정부는 부도를 유예하거나 막는데에만 골몰하고 있다. 개별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냉철히 볼 때 부실한 기업은 망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단지 망하지 않을 기업이 다른 사건의 여파로 쓰러지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이왕 겪고 있는 어려움은 있는 그대로 감내해야 한다. 독일은 극도의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인플레이션 치유의 교훈으로 삼지 않았는가. 이제는 「3.4분기 이후에 경기가 회복될 것」이라는 등의 막연한 낙관론에 취하지 말자. 지금 우리는 일시적 경기회복에 안도할 것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가 무엇인지를 잘 점검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정부는 정권말기에 현실과 동떨어진 개혁프로그램을 짜기 보다 냉철한 현실파악에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정치인들의 비전형성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정운찬(서울대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