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중요한 전략물자 중 하나가 말이었다. 조선 시대에 장교나 정예병이 되려면 반드시 말이 있어야 했다. 조선은 전국에 국영 목장을 설치해서 좋은 군마를 생산하고 사육했다. 목장의 수는 시대에 따라 변하는데, 50개 후반에서 많을 때는 120개 정도까지 되었다.
목장은 섬이나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곶에 설치했다. 말이 도망치지 못하게 관리하는 측면도 있었고, 농지를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경작이 힘든 지역을 골랐던 이유도 있다. 도둑질이 어렵고, 말이 통하지 않는 맹수의 침입을 막기 쉽다는 점도 섬이 인기인 이유였다. 맹수로 인한 손실이 적지 않았는데, 섬에 목장을 설치하자, 아마 육지에서 가까운 섬이었겠지만, 어이없게도 호랑이와 표범도 따라 들어와서 번식했다고 한다.
목장 사업은 번창해서 성종 대에는 무려 4만 마리를 사육했다. 그러나 이때를 기점으로 점점 줄어들더니 고종 때가 되면 5600필 정도로 줄어들었다. 진짜 문제는 군마로 쓸 좋은 말은 지극히 적었다는 것이다. 좋은 말은 비쌌다. 상등마의 가격은 쌀 30석 정도였다.
전투에 투입하는 말은 수송용으로 쓰는 말, 전장에서 타는 말, 장수가 타고 싸우는 최고급 전마로 구분할 수 있다. 전국에 수만 마리 말이 있어도 군마로 쓸 수 있는 말은 적었다. 1492년 성종은 여진 정벌을 하면서 전국 목장에서 좋은 말을 골라 병사들에게 지급했는데, 군마로 뽑은 말이 800필, 전마는 겨우 40필이었다.
좋은 말이 적은 이유로 목장 근무자들이 빼돌린다, 권력가들이 몰래 가져간다는 등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원래 말 중에서 군마로 쓸 수 있는 말은 적다. 조선의 사육정책도 문제가 있었다. 목장감독관의 성적은 생산한 말의 수만으로 평가했다. 질은 객관적인 수치로 평가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한때 고려와 조선에선 최고급 몽골말을 생산했었지만, 이런 행정 편의주의적인 관리로 목장은 쇠퇴하고 말의 질은 떨어졌다. 후기가 되면 좋은 군마는 만주에서 들여오는 수입마가 인기를 끌었다. 현대에는 우리나라에 이처럼 많은 말과 기병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