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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보이는 사물들

Posted April. 24, 2023 08:19,   

Updated April. 24, 2023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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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함을 잃을 때 모든 존재는 쓸쓸함을 얻는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자주 의기소침해지는 이유도 그와 비슷하다. 상대방의 마음이라는 건 도대체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 같기만 하고, 나는 ‘저녁’ 앞에서 노인처럼 어두운 눈을 비비는 것이다.”―한정원 ‘시와 산책’ 중에서

저녁 식사 자리에서만 두어 번 만난 사람이 있었다. 세 번째 만남 즈음해서 처음으로 그를 대낮에 보았다. 맑게 우러난 홍차 같은, 밝은 갈색 눈동자가 눈에 띄었다. 동양인에게선 자주 볼 수 없는 색이라 한참 바라보며 감탄했다. 해 떨어진 데서는 저 아름다운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구나.

그 후로 나는 저녁에 보이는 사물들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땅거미 내린 거리, 이 색과 저 색의 경계가 흐려지고 이 형태와 저 형태의 분별이 까다로워지면, 그 어떤 대상도 함부로 확신할 수 없게 된다. 그런 마음으로는 의기양양할 수 없다. 잘난 체할 수 없다. 저녁의 시선은 겸허를 알려준다.

작가 한정원은 그 순간을 사랑에 빗댄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방의 마음을 알고자 분투하지만 그 노력은 대개 허사로 돌아간다. 사랑하면 할수록 상대의 마음은 ‘저녁’처럼 흐릿해진다. 바꾸어 말해 볼까. 상대의 마음이 너무 환히 비친다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사랑이 맞는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한 사람을 꿰뚫고 있다는 확신이 과연 사랑일까. 오만의 다른 이름 아닐까. 사랑은 끊임없는 질문과 발견. 알 듯하지만 알지 못하고 닿은 줄 알았지만 닿지 않은 것.

저녁의 시선은 사랑뿐 아니라 모든 관계에 귀하다. 눈에 보이는 것 너머를, 타인의 아득한 역사를 헤아리려는 태도가 존중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흑과 백으로, 네모와 세모로 타인의 색과 모양을 규정하고 싶을 때마다 나는 “노인처럼 어두운 눈을 비비는” 마음가짐으로 돌아가려 한다. 선명하지 않은 세상은 작가의 말대로 쓸쓸하겠지만. 진짜 신의는 서로의 쓸쓸함 속에 움틀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