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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소신

Posted December. 24, 2021 09:02,   

Updated December. 24, 2021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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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름과 나란히 산마루에 걸린 잔설이 곱디곱다. 쾌청한 날씨에 노을빛이 숲머리에 반짝이니 장안성의 겨울은 더없이 상큼하다. 하지만 잔설을 바라보는 여유도 잠시뿐, 저물녘이 되면서 분위기가 일변한다. 수려한 산세와 구름 끝에 피어난 잔설, 반짝이는 숲머리로 화사했던 성안은 한기가 엄습하면서 한순간에 뒤바뀐다. 시인은 왜 갑작스레 반전을 꾀했을까. 빼어난 경관을 한껏 부각함으로써 자신의 고뇌의 깊이를 더욱 도드라지게 하려는 수사적 효과를 노린 듯싶다.

 이 시는 시첩시(試帖詩), 즉 과장(科場)에서 즉흥적으로 써낸 답안용 시다. 대개 시는 개성적 자아를 표현하는 데 주력하지만 시첩시는 정해진 규율을 얼마나 충실하게 따르는가를 중요한 덕목으로 친다. 시제도 시인의 뜻과는 무관하고 5언12구(60자)를 채워야 했다. ‘쓰지 않으면 못 배길’(릴케) 그런 절실한 감흥 따위를 따지고 자시고 할 계제가 못되었다. 천여 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시첩시 중에서 제대로 된 명시가 탄생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시첩시의 엄격한 기준을 무시하고 스무 자로 마무리해버린 조영. 즉석에서 시험관이 시첩시의 규격에 맞추는 게 어떻겠느냐고 충고했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시흥이 돋는 대로 지을 뿐 할 말을 끝냈는데 굳이 사족을 달 건 없지 않느냐는 소신을 견지했다. 물론 낙방이었다. 그래도 이 시는 당시의 정수(精髓)를 수록한 ‘당시 3백수’ 가운데 유일한 시첩시라는 영예를 얻을 만큼 그 진가를 인정받았다.성균관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