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to contents

불혁명 가치 계승한 고귀한 전쟁 참전 자체가 자랑스럽다

불혁명 가치 계승한 고귀한 전쟁 참전 자체가 자랑스럽다

Posted March. 08, 2010 09:50,   

日本語

지난달 18일 정오 프랑스 파리 시내 샹드마르 광장 인근에 있는 한식당. 70대 후반, 80대 초반의 노인들이 모여들었다. 다들 양쪽 가슴엔 올리브 가지를 그려 넣은 유엔군 프랑스대대 배지, 그리고 태극기와 프랑스기가 교차한 기념 배지가 달려 있었다. 손에는 빛바랜 스크랩북과 낡은 사진첩이 쥐어져 있었다. 새로운 얼굴이 등장할 때마다 서로 양쪽 뺨을 맞대고 인사를 나눴다.

이들은 프랑스의 625전쟁 참전용사들의 모임인 한국전쟁참전용사회 회원들. 한국의 동아일보에서 취재를 왔다는 얘기를 듣고 파리와 근교에 살고 있는 회원 30여 명 가운데 16명이 모인 것이다.

한 참전용사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이것 좀 봐, 우리가 부산항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다룬 당시 신문 기사야라며 누렇게 변색된 프랑스수아지를 펴보였다. 앙드레 다차리 씨(78)는 오래된 컬러 사진 10여 점을 자랑스레 테이블 위에 늘어놨다. 1951년 내가 찍은 한강과 용산, 남대문의 모습이야. 지금 서울은 마치 뉴욕 같지만 50여 년 전엔 시골 마을 같았다고.

60년 전 10대 후반과 20대 초반 청년이었던 이들에게 전쟁은 낯설지 않았다. 제1, 2차 세계대전의 무대였던 프랑스 젊은이들은 전쟁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생 독립국 코레(Coree)는 미지의 세계였다.

한국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어. 군 복무 중이어서 지원했는데 한국이란 나라를 지도에서 처음 찾아봤지. 앙리 라무슈 씨(82)의 말에 옆자리의 마르셀 브누아 씨(80)도 거들었다. 인도차이나전쟁을 다녀온 뒤였는데 친구들이 한국은 인도차이나만큼 덥지는 않다고 하더군. 내가 자원한 것은 그게 이유였어.

프랑스대대는 마르세유항을 출발한 지 36일 만인 1950년 11월 29일 부산항에 도착해 14후퇴 다음 날인 1951년 1월 5일 전선에 배치됐다. 이후 지평리전투(1951년 2월 1315일), 단장의 능선 전투(1951년 9월 13일10월 13일), 화살머리 고지 전투(1952년 10월 610일) 등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대부분 세계대전과 인도차이나전쟁을 겪은 베테랑들이었지만 혹독한 희생을 치러야 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까지 세 차례 3개 대대를 교체하며 연인원 3421명이 참전한 프랑스군의 인명 피해는 전사 262명, 부상 1008명, 실종 7명이다. 참전용사의 3분의 1 이상이 사상자가 되거나 실종된 것이다. 세르주 아르샹보 씨(80)는 1952년 2월 중공군의 포격을 받았을 때 바로 앞에 있던 동료는 로켓포를 허리에 맞아 몸이 두 동강 났고 바로 뒤에 있던 동료도 거꾸러졌다. 포격이 끝난 뒤 온전한 사람은 나뿐이었다고 회고했다.

낯선 한국 땅에서 생과 사를 넘나들었던 용사들에게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을까. 자크 그리졸레 씨(80)가 시원스러운 답을 줬다.

남쪽으로 향하는 끝없는 피란민의 행렬을 보면서 과연 한국이란 나라에 미래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었지. 하지만 한국은 어느 나라도 부러워할 만큼 눈부시게 발전했어. 한국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한 내 자신이 자랑스러워.

피에르 마비요 씨(82)는 한국인들이 한국전쟁 이후 이뤄낸 모든 것에 찬사를 보낸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을 무한한 자랑으로 여긴다며 프랑스는 나의 조국, 한국은 두 번째 조국이라고 말했다.

한국전쟁참전용사회의 현재 회원은 366명으로 직접 참전한 용사가 151명이고 나머지는 유족들이다. 프랑스에는 인도차이나전쟁, 알제리전쟁 등 참전자들이 많지만 참전용사회란 조직이 구성돼 있고, 정례적인 모임을 갖는 것은 한국전쟁참전용사회가 유일하다고 한다. 그 이유를 묻자 스타니슬라 살리 씨(79)는 한국전쟁은 프랑스혁명 전사의 후손으로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평화와 자유를 위해 싸운 고귀한 전쟁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