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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지킨 항일 섬 그들은 하나였다

Posted August. 15, 2005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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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소안민불안 산명가학학불래( 섬 이름은 편안한 곳이지만 백성은 편안치 않고, 산 이름은 학이 모이는 곳이지만 학은 오지 않네).

전남 완도군 소안도에서 일제강점기 애국지사들이 망국의 한을 달래며 읊조렸다는 시구다.

항일의 섬 소안도는 완도에서 남쪽으로 20.8km 떨어져 있다. 뱃길로는 1시간 거리.

소안도는 일제강점 35년 동안 섬주민들이 감옥에 투옥된 기간을 합산하면 무려 300년 가까이 될 정도로 항일의식이 높았던 섬이다.

인구가 3800여 명에 불과하지만 소안도는 지금까지 20명의 건국훈장 서훈자를 배출해 전국에서 면() 단위 가운데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가 나왔다. 이는 27명의 국가유공자를 배출한 의성 김씨 내앞() 문중과 견줄 만하다.

독립유공자 후손인 김남천(82) 옹은 내앞 문중이 경상도 안동을 근거지로 한 양반가문이라면 소안면 사람들은 전라도 작은 섬에 기반을 둔 평민이었다는 점에서 항일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고 말했다.

소안도는 목포에서 제주로 가는 길목에 있어 섬사람들은 일찍 외부세계에 눈을 떴다. 1900년대에 서당과 야학을 세우고 신교육을 시작해 문맹자가 거의 없었다.

항일의 시발은 토지반환 소송이었다. 1909년 일제가 소안면 전체 토지를 당시 조선 황실의 친척에게 넘기자 서울지방법원에 소송을 냈다. 13년 동안의 법정 투쟁 끝에 승소판결을 받아 낸 주민들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1만400원(현 화폐가치로 1억 원 상당)을 거둬 강습소 수준인 중화학원을 정식학교인 사립소안학교로 승격시켰다.

소안학교는 전국의 우국지사들이 교사를 자임하는 등 항일운동의 산실로 이름 높았다. 대표적 인사가 동아일보 지방부장을 지낸 이시완() 선생이다. 이 선생은 지도상에도 잘 보이지 않는 소안도에서 크고 작은 항일 관련 기사가 올라오자 소안학교로 내려가 학생들을 가르쳤다.

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 김원택(58) 사무국장은 일제는 소안학교가 일장기를 달지 않는 등 반일에 앞장서자 1927년 강제로 폐쇄했다며 이 선생이 학교 폐쇄에 통분하며 지었던 이별가는 지금도 주민 사이에 널리 불리고 있다고 말했다.

소안도를 항일 성지로 만든 인물은 비자리 출신 송내호(18951928) 선생. 1913년 서울 중앙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19세에 귀향해 중화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31운동 때 완도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비밀결사조직인 일심단을 만들어 중국 광둥() 황포군관학교에 조직원을 파견하기도 했다.

송 선생과 함께 활동했던 소안면 출신 독립운동가는 모두 88명. 이들은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노선을 걷기도 하고 사회주의 노선을 택하기도 했다.

광복 이후 좌우 이념대립에 휘말리면서 소안도는 1950년 보도연맹사건으로 면민 270여 명이 희생당하는 아픈 과거를 간직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항일투쟁사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 왔다.

기념사업이 본격화된 것은 1990년. 면민과 출향인사 등이 십시일반 돈을 거둬 섬에 항일운동기념탑을 세우고 사료집을 발간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때 처음으로 송내호 선생 등 14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됐다. 면민들은 올해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국가유공자로 추서되자 잃어버린 반쪽의 독립운동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정승호 sh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