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민사회의 서사시가 소설이라고 사람들이 내게 가르쳐 주었소. 그들이 은밀히 속삭였소. 인류사와 더불어 가는 것이 소설이라고. 그러니까 근대의 산물이자 근대와 나란히 간다는 것. 이 경우 근대란 무엇이었던가. 국민국가의 세움, 자본제 생산양식에의 길이라는 것. 이 둘이 분리불가능의 관계에 있다는 것.
이 둘의 전제엔 뚜렷한 명분이랄까 신념이 깔려 있다고 했소. 인간은 이성의 힘으로 세계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는 명제가 그것이오.
인간 이성에 대한 절대적 신뢰란 과연 과학적인 것일까, 한갓 헛것일까. 인간 영혼 속 깊은 곳까지 통찰한 대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를 두고 악령 속의 한 인물의 입을 빌려 인류가 발명해 낸 가장 황당무계한 망상이지만 모든 민족은 이것 없이는 살기는커녕 죽을 수조차 없다고 갈파했소.
인류사! 이것만큼 가슴 설렌 울림이 있을 수 있었을까. 그 인류사와 나란히 가는 도상의 예술 양식이 소설이라면 소설만큼 가슴 설렘의 형식이 달리 있을까. 중심이 하나인 이 둥근 원으로 된 역사사회학적 상상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세대가 있었소.
20세기 전반부터 태어나 철날 무렵 일제와 미국식 교육제도에 침윤되고 625전쟁을 통과해 온 세대, 러시아어 사전 지니기도 금기사항이었던 반공을 국시로 하는 바람과 흙 속에서 자국의 근대문학 공부에 나아간 세대 말이오.
그들이 바라본 이 나라 근대문학이란 어떠해야 했던가.
국민국가와 자본제 생산양식에 의해 무자비하게 헐뜯기는 한민족의 운명이자 동시에 그 운명의 타개방식의 위대함이었소. 인간의 위엄에 어울리는 표상, 인간은 벌레가 아니다로 요약되는 생각과 정서가 언어갈피 속에 은밀히 조직화되어 있지 않았던가. 그 연장선상에서 분단문학과 노사문학이 우람하게 전개되었소.
이러한 현상이 이성의 힘으로 세계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는 명제 속에서 싹튼 것인가, 아니면 그런 명제 자체 속에 깃든 악마적 요소에 대한 반응 방식이었을까.
이런 물음을 피해갈 수 없는 시기가 찾아왔소. 동유럽 및 구 소련 해체로 표상되는 역사사회학적 상상력의 불신 또는 거기에 깃든 악마적 요소의 드러남이었소. 우리가 갈 수 있고 또 가야 할 길을 가리키던 저 창공의 별이 돌연 사라진 형국. 역사의 끝장 의식에 사로잡혔소.
이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소설읽기에 한층 힘 쏟기가 그것이오.
소설이란 무엇인가. 세 가지 층위로 이루어진 일정한 관습적 언어의 조직체가 아니겠소. (A)작가의 의도적 층위 (B)작가의 무의식 층위 (C)작가가 속한 시대적 사회적 집단무의식의 층위들이 그것. (A)의 판독은 쉬운 일. (B)의 판독엔 상당한 집중력이 있어야 될 터. (C)의 판독이 가장 어려운데, 모종의 징후로만 감지되는 법이니까. 이 징후야말로 소중한데, 역사의 끝장 이후의 나아갈 방향성의 징후일 테니까요.
은어낚시통신(1994윤대녕) 속에 모종의 예감이 감지되었소. 인간은 은어(연어), 메뚜기, 철새다라는 것. 인간은 벌레다의 명제. 생물학적(실은 동물학적) 상상력에로의 거대한 전환이 아니겠소.
생물로서의 인간으로 재규정될 때, 그 줄기에 생명사상, 생태사관, 환경문제, 그리고 DNA 연구에로 상상력의 지평이 엿보였소. 이 상상력의 유효성은 또 얼마나 지속될까. 응당 이런 의문이 우리 앞에 덩그렇게 걸려 있었소. 생물 자체가 위협 앞에 전면적으로 노출되고 있으니까. 동물이 바야흐로 생명 범주에서 소멸되는 장소. 그 징후로 드러난 것이 민들레씨앗(김지하)이 아니었겠소. 동물적 이미지에서 식물이미지에로의 전환이 그것. 또 하나의 끝장의식이 겹쳐왔소. 사이버 공간의 무한대 앞에 활자로서의 소설은 포자()로 번식하는 버섯이미지(김춘수)에 닿지 않을까. 여기까지가 제 소설읽기였소.
전위 속의 후위란 말이 있소(R 바르트). 전위이기에 무엇이 죽어 가는가를 아오. 후위인 것은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이오. 더 이상 죽을 수 없는 민들레 씨앗, 버섯의 포자를.
김 윤 식(명지대 석좌교수,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