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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내내죽음의순간먹지도자지도못해

6•25전쟁내내죽음의순간먹지도자지도못해

Posted June. 20, 2013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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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한국의 젊은이들이 3년여간 북한의 불법남침에 맞서 싸웠던 순간들을 글로 표현해 625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625 참전용사 이형춘 옹(84)은 국가보훈처가 최근 주관한 2013년도 보훈문예물 공모전 참전수기 부문에 응모하며 이같이 밝혔다. 이 옹의 수기는 장려상을 받았지만 최우수상보다 더 보훈처 관계자들의 눈길을 끌었다고 한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생한 순간부터 1954년 4월 20일 전역을 할 때까지 3년 10개월간의 기억을 A4 용지 32장에 연필로 꾹꾹 눌러 썼다. 보훈처의 한 관계자는 맞춤법이 틀린 곳도 많고 문장이 엉성한 부분도 적지 않았지만 직접 수기를 써 내려간 정성과 그 처절한 내용이 읽는 이를 숙연케 했다고 전했다.

이 옹의 수기는 625전쟁 개전에서부터 시작한다. 당시 군복무 중이던 이 옹은 전쟁에 대한 대비를 전혀 못한 채 625를 맞이했다. 그는 아군도 기관총과 81mm 박격포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실탄이 보급되지 않아서 차라리 몽둥이를 들고 맞서는 것만도 못한 상황이었다. 탱크로 밀고 내려오는 인민군을 소총만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낙오병이 돼 본대에서 3개월가량 떨어져 있으면서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는 고난을 겪어야 했다. 밤에 잠시 눈을 붙이려 해도 너구리 살쾡이 등 산짐승의 습격을 받아 힘겹게 눈을 뜨고 있어야 했다.

북한군의 기습을 받고 전우들과 후퇴하던 중 인민군으로부터 항복하면 부상을 치료해주고 먹을 것을 주겠다는 회유를 받기도 했다. 그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후방의 국군과 합류하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일부 병사들은 설마 같은 민족인데 죽이기야 하겠느냐며 투항을 택했다. 하지만 인민군들은 이들이 투항하자마자 서울로 압송해 삼각산 중턱 산골짜기에서 기관총 사격으로 전원 사살했다고 한다.

낙오병의 생활을 마친 그는 원대 복귀에 성공한 뒤 유엔군과 함께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하기 시작했다. 1950년 10월 27일 평안북도 운산에 진격했을 때만 하더라도 통일의 순간이 눈앞에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중공군 50만 명이 압록강을 넘어오자 그는 눈물을 흘리며 발길을 되돌렸다.

전쟁이 교착상태를 보이는 동안 이 옹은 보병 제12연대 수색정찰대원으로 배속돼 한강 이남에 남아 있던 북한군과 중공군 격퇴 업무를 맡았다. 그 과정에서 야간 수색정찰을 벌이다가 8명의 분대원을 잃는 아픔도 겪었다. 이 옹은 625전쟁 내내 밤낮으로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던 그때를 잊을 수가 없다고 토로했다.

이 옹은 미국 등 우방의 지원이 없었으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이 지구상에 없었을 것이라며 유엔 참전국들에 대한 감사의 뜻을 나타냈다. 또한 제2의 625를 막기 위해선 국민들이 철저한 안보의식을 갖고 국가 차원에서 병역기피자들을 엄벌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