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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들고 항복하는 사람도 무차별 사살

Posted October. 26, 2006 06:58,   

日本語

1918년 일제는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 독일령이었던 남태평양 마셜제도를 점령했다. 2차 대전 중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미군의 반격에 대비해 마셜제도에 대규모 부대를 파견했다. 이때 마셜제도에만 조선인 3만6000여 명이 강제 동원됐다. 마셜제도 동남쪽 끝에 있는 밀리 환초에도 800여 명의 조선인 군속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170여 명이 체르본 섬에서 무차별 총살당했다. 반란을 일으켰다는 죄목에서다. 당시 생존자들은 일본군이 조선인의 인육을 먹었다는 충격적 증언도 하고 있다. 60여 년 전 마셜제도 밀리 환초에선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당시 밀리 환초로 끌려갔다 천우신조로 살아 돌아온 이인신(83) 씨가 1995년 집필한 수기를 토대로 당시 일제의 만행과 조선인 집단 학살 상황을 재구성했다.

식량보급 끊겨 풀잎으로 연명

1942년 초 일제는 농촌 마을을 돌아다니며 조선 청년들을 닥치는 대로 전쟁터로 끌고 갔다. 이 씨 역시 1942년 3월 23일 부산항에서 배를 탔다. 듣도 보도 못한 남태평양 마셜제도 밀리 환초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13일 뒤인 4월 6일. 뱃멀미로 초주검이 돼 있었지만 이 씨를 포함해 수백 명의 조선인 군속은 열대의 폭염 속에 바로 노동 현장에 투입됐다.

이들은 주로 활주로를 만드는 일을 했다. 마셜제도는 미국을 폭격하기 위한 전초기지였던 셈이다. 일본인 감독관들은 작업이 더디면 여지없이 몽둥이찜질을 가했다.

1943년 2월경 식량을 가득 실은 일본 화물선이 밀리 환초에 정박하려는 순간 미군 전투기의 폭격을 받아 삽시간에 침몰했다. 이때부터 본국에서도의 식량 공급은 끊겼다.

밀리 환초에 있던 일본군 지휘부는 더는 부대 운영이 힘들자 부대원을 40여 개의 인근 섬으로 분산 배치해 식량을 자급자족하도록 했다.

체르본 섬의 비극

체르본 섬으로 간 일본인, 조선인 수백 명은 콩잎과 같은 풀잎으로 죽을 쒀 먹으며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1945년 초 체르본 섬에선 조선인 군속이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조선인들은 몇 명씩 조를 짜 여러 차례 이 조선인을 찾으러 다녔지만 헛수고였다. 그러던 어느 날 체르본 섬 인근 무인도로 물고기를 잡으러 갔던 조선인들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실종된 조선인의 시체를 발견했는데 허벅지살이 포를 뜬 것처럼 잘려나가 있었던 것.

이들이 더욱 경악한 것은 며칠 전 일본인들이 선심을 쓰듯 건넨 고래 고기 때문이었다. 당시엔 모처럼 먹는 고기 맛에 포만감을 느꼈지만 그 고기가 고래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에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아무런 장비도 없는 일본인들이 고래를 잡아다 조선인에게 줄 리 없었다.

그리고 며칠 뒤 조선인 군속이 또다시 실종됐고 그 군속 역시 비슷한 모습으로 발견됐다고 한다. 조선인들은 밀려드는 공포감을 주체할 수 없었다. 결국 섬을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섬 주변엔 미군 함정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들만 없애면 미군 군함에 구조를 요청할 수 있었다.

1945년 3월 18일 밤 드디어 조선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일본인 7명을 죽이고 탈출을 시도하려는 순간, 기관총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한 조선인이 걸어서 1시간 거리에 있는 루코노르 섬으로 가 이런 사실을 밀고했고 중무장한 일본군 토벌대 50여 명이 체르본 섬으로 들이닥쳤다. 손을 들고 항복한 조선인에게도 가차 없이 총알 세례가 이어졌다. 쓰러진 조선인에겐 총검이 날아들었다. 항거를 주동한 조선인 5, 6명은 무고한 조선인들을 죽게 한 책임감에 서로 껴안고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 자폭했다.

당시 체르본 섬 학살 때 살아남은 박종원(2000년대 초 작고) 씨에 따르면 부상자 2명을 포함해 15명 정도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60년간 악몽에 시달려

체르본 섬 학살 사건이 벌어지고 20여 일이 지난 뒤 인근 섬에서 시체를 정리하기 위해 체르본 섬으로 간 김재옥(82) 씨는 배가 섬에 다다르자 시체가 바다 위에 둥둥 떠다녔다며 온 섬이 엄지손톱만 한 파리 떼로 가득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이 씨는 1995년 밀리 환초를 다시 찾아갔는데 학살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며 하지만 당시의 참혹한 기억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아 수기를 쓰게 됐다고 말했다.



윤완준 이재명 zeitung@donga.com egij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