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현과 UFC 파이터 출신 방송인 김동현. 정지현 인스타그램
경기 시작 전만 해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같았다. 씨름은 체급 경기이지만 이날은 레슬링 팀의 정지현과 야구팀의 양준혁이 일대일 대결을 벌였다. ‘골리앗’ 양준혁은 경기 시작과 함께 힘으로 내리눌렀다. 정지현의 한쪽 다리가 들리면서 승부는 그대로 끝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지현은 왼쪽 다리로 한동안 버텼다. 그리고는 되치기를 시도해 거구 양준혁을 모래판에 누여 버렸다. 정지현은 “레슬링은 밸런스와 기술의 스포츠다. 레슬러들은 자기보다 힘센 사람들을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다”고 했다.
정지현이 채널A 천하제일장사에서 거구 양준혁을 쓰러뜨리고 있다. 채널A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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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현의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결승전 경기.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하지만 다음 목표였던 올림픽 두 번째 금메달은 끝내 손에 잡히지 않았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8강에서 누르바키트 텐기즈바예프(카자흐스탄)에게 1-2로 패했다. 순간의 방심이 화를 불렀다. 정지현은 “약 5초 정도를 남기고 상대 선수를 던졌다. 속으로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5초를 버티지 못하고 역전당했다”라며 “경기든 인생이든 정말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는 걸 절감했다”고 했다.
이후 2012년 런던 올림픽을 누구보다 간절하게 준비했다. 하지만 런던에서도 8강에서 아제르바이잔 선수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고 말았다. 정지현은 “정말 열심히 준비했고 컨디션도 좋았다. 하지만 올림픽이라는 무대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했다”고 했다.
비록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는 세 차례나 올림픽 무대를 밟은 몇 안 되는 레슬러다. 2014년 인천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는 71kg급으로 체중을 높여 금메달을 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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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현과 그를 지도한 안한봉 감독. 동아일보 DB
10년 넘게 선수촌 밥을 먹은 정지현에겐 운동이 지겹지 않았을까. 그는 “땀을 흘리고 숨이 가빠 져오는 게 여전히 즐겁다. 레슬링은 알아갈수록 더 재미있다”고 했다.
선수에서 은퇴하고 지도자 생활을 하던 그가 2023년 말 서울 서초구 강남역 근처에 ‘짐오브레슬러’라는 레슬링 전문 체육관을 세운 이유다. 관장이자 서무, 행정, 심지어 청소까지 1인 다역을 하는 그는 매일 저녁 회원들과 함께 매트를 뒹군다. 정지현은 “레슬링은 대중적인 운동도, 쉽게 배울 수 있는 운동은 아니다. 기본자세를 제대로 익히는 데만 2, 3개월이 걸린다”라며 “하지만 하나씩 기술을 익혀가며 테이크다운(상대를 바닥에 쓰러뜨리는 기술)을 성공시킬 때의 쾌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체력과 자신감이 커지는 효과도 있다”라고 했다.
정지현과 그의 레슬링 체육관을 찾은 손석구. 정지현 인스타그램
선수에서 은퇴한 뒤에도 그는 꾸준한 단련으로 선수 시절 못지않은 몸을 유지하고 있다.
정지현은 2023년 그리스에서 열린 베테랑 세계선수권대회 남자 70kg급에 출전해 금메달을 땄다. 앞서 그는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그리고 아시아선수권 대회 금메달을 딴 상태였다. 여기에 현역 시절 성공하지 못했던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명예’ 그랜드슬램을 이루게 됐다. 정지현은 “현역 시절 세계선수권대회에 자주 출전하지 못했다. 동메달만 두 번 땄는데 뒤늦게나마 기회가 생겨 베테랑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을 하게 됐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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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거인’ 정지현이 운동 마니아인 개그맨 김병만과 함께 컨셉 사진을 찍었다. 정지현 인스타그램
정지현은 달리기와 기능성 운동을 결합해 젊은 층을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하이록스(HYROX)’ 대회에도 출전할 생각이다. 하이록스는 1km 러닝과 8개 기능성 운동을 반복해 승부를 가리는 실내 스포츠다. 정지현은 “선수 시절 매일 위액이 나올 정도로 훈련을 했다. 옛날 생각하면 정말 질리게 운동을 했던 것 같다”라면서도 “그래도 운동을 할 때가 즐겁고 재미있었다. 지금도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운동하면 더 힘이 나고 재미있다. 나는 영원히 몸을 써야 하는 운명인 것 같다”라고 했다.
여전히 탄탄한 몸을 유지하는 정지현. 정지현 인스타그램
그의 다음 목표는 레슬링의 매력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 체육관을 잘 운영하면서 레슬링 유튜브도 다시 시작하려 한다. 정지현은 “언젠가는 다시 레슬링계로 돌아가 후배들이 내가 따지 못한 두 번째 올림픽 금메달을 따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