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기 정치부장
광고 로드중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11일 의원총회에서 “당정대 간 바늘구멍만 한 빈틈도 없이 의견이 일치한다”고 강조했다. 내란전담재판부 설치법 등 사법개혁안에 대해 대통령실과 당 지도부 간 이견이 없다는 뜻이다. 이에 앞서 9일 이재명 대통령은 정 대표, 김병기 원내대표와 ‘번개 만찬 회동’을 가졌다. 사법개혁을 두고 불거진 이견을 정리하기 위한 자리였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회동 뒤 “개혁 입법은 국민의 눈높이에 맞게 합리적으로 처리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당정대 역할분담론의 함정
정 대표 측은 만찬 회동에 대해 “당에 힘을 실어준 것”이라고 해석한다. ‘1인 1표제’ 부결에 이어 민주당 최고위원 보궐선거를 앞두고 불거진 이른바 ‘명청 대전’(이 대통령과 정 대표 간의 갈등) 논란을 진화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 핵심 논리로 내세우는 것이 이른바 ‘역할 분담론’이다. 법제사법위원회가 강성 당원들의 목소리를 반영해 ‘더 센’ 내란전담재판부 설치법 등을 추진해 지지층의 효능감을 높이고, 대통령실이 중도층의 우려를 반영해 합리적 대안을 주문하면 이 과정에서 당 지도부는 강성 당원과 내부 엘리트, 반대 진영의 비판을 대신 받아내 저항을 줄이고 수용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 강경파가 앞장서서 목소리를 높이면 대통령실이 제동을 걸어 이후 나오는 수정안이 온건하게 보이게 하는 효과를 겨냥한 일종의 계산된 혼선이라는 취지다. 정청래식 ‘페이스메이커(pacemaker)’론인 셈이다.
광고 로드중
강경 지지층만 바라본 당 지도부와 법사위의 사법개혁 드라이브는 당내 역풍과 소모적인 극단 대치로 이어졌다. 8일 의원총회에선 “정쟁의 소용돌이에 빠지면 민주당에 이득이 될 게 뭐가 있느냐”는 등 우려가 쏟아졌다. 국민의힘은 내란전담재판부 설치법 등을 묶은 이른바 ‘8대 악법’ 철회를 요구하며 모든 민생법안에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발동했다. 내란전담재판부를 막겠다며 민생법안 표결마저 막아선 국민의힘의 무리수는 ‘의제 외 발언’을 이유로 국회의장이 61년 만에 직권으로 필리버스터를 중단시키는 또 다른 무리수로 이어졌다.
갈등과 퇴행 속 뒷전으로 밀린 민생
이쯤 되면 역할 분담의 손익을 다시 계산해볼 필요가 있다. 갈등과 혼란이 커질수록 강성 지지층과 그들의 목소리에 호응한 당 지도부 및 법사위 강경파의 결속은 강해진다. 상대 진영도 수혜자다. 12·3 비상계엄 사태를 두고 내홍이 커지던 국민의힘은 이른바 ‘8대 악법’ 저지를 명분으로 무제한 필리버스터와 천막농성에 들어가며 당내 리더십으로 향한 시선을 당 밖으로 돌리고 있다. 연말까지 이어질 입법 전쟁으로 정쟁에 휩쓸릴 가능성이 커진 대통령실의 부담은 커졌다. 물론 가장 큰 피해자는 민생법안 처리 지연과 퇴행적 정치를 지켜봐야 할 국민이다.
‘당원 주권주의’를 내건 정 대표 측에선 대통령실과의 불협화음이 ‘자기 정치’로 해석되는 데 대해 강한 불쾌감을 내비친다. 하지만 불협화음이 건강한 수평적 견제 관계가 아닌 민생을 희생한 권력 갈등으로 비치는 건 권력을 위해 불필요한 대립을 부추기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 때문이다. 페이스메이커가 자기 욕심을 앞세우면 레이스를 망치는 법이다.
광고 로드중
문병기 정치부장 weapp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