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닮은 정치인 대신 ‘숏폼 연예인’ 등장 막말 영상이 나쁜 진짜 이유는 공론장 잠식 정치인들에게 고(告)함… 제발 멈추라 지는 게 이기는 것… 유권자는 기억한다
김승련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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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정치부 기자 시절, 안도현 시인의 글을 읽고 정치인이라면 시작(詩作)에서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안도현은 시인을 ‘말로 세상을 바꾸는 존재’로 여겼다. 그는 시를 쓰는 태도에 대해 “허리를 낮추거나 무릎을 구부려 (길가의 들풀을) 관찰할 줄 알아야 한다” “양심을 속이거나 거짓됨이 없어야 한다”고 썼다. 유권자 앞에 더 낮아지고, 삿됨 없이 정직한 언어로 세상을 마주하는 정치인들이 더 나올 수 있겠다 기대했다.
당시 생각이 부질없었음을 인정한다. 모두가 고개를 젓는 작금의 정치는 시적(詩的)이기는커녕 추문(醜文)이 너무 많아졌다. 국정 사유화, 계엄, 탄핵, 정권교체에 이어 거대 여당이 이끄는 국회를 지켜보며 이런 생각을 갖는 이들이 더 늘었을 것이다. 요즘 법사위에서의 고성, 반말과 삿대질, 방미통위에서 벌어진 언어폭력을 통해 바닥에 떨어진 정치를 봤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만든 현상이라지만, 정치인들은 문제를 바로잡기는커녕 한술 더 떠 이 흐름에 올라타 강성 지지층만 바라보고 있다.
정치인의 저질 발언이 뭐가 새삼스럽냐고 반문할 수 있다. 2008년 11월 동아일보가 보도한 여야 대변인의 1년 치 논평 1000건 분석 기사를 보면 답을 찾을 수 있다. 놀라운 건 상대 정당에 대한 공격성과 적대감에서 가장 부정적 점수를 받은 논평 2가지다. “(그들은) 시대착오적인 극우 형제” “정권교체 저지를 위한 마지막 발악이 (민주당) 곳곳에서…”. 지금은 매일같이 듣는 이런 논평이 최악으로 평가되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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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품격이 떨어진 정치는 그 공격성만이 문제는 아니다. 사막 같은 정치 언어는 생각의 빈곤, 콘텐츠 부재를 가리는 외피가 돼 버렸다. “첫째, 둘째, 셋째”를 말하며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옛 정치인들이 그리울 정도다. 올망졸망하게 키 작은 정치인들만 넘쳐난다. 선수(選數)는 쌓았으되, 지도자다움을 키우지 못한 결과다. 대통령감, 당 대표감으로 여겨지는 거물이 점점 줄고 있다. 전체적으로 국회의원들 언어가 옛 부대변인과 비슷해졌다.
내실 없음은 숏폼 정치로 때우고 있다. 숏폼 속 정치인들은 연예인과 다를 게 없을 때가 많다. 한 세대 전 미국 워싱턴 정가에서 유행하던 말(“Politics is show business for ugly people”)이 한국에도 상륙한 것이다. 의역하자면 “정치인과 연예인은 똑같은 기질을 지녔다. 인물이 빼어나면 연예인을 하고, 그 반대는 정치를 할 뿐이지”라는 뜻이다. 이런 정치의 큰 해악은 국가 현안을 다뤄야 할 신문지면과 방송뉴스 시간을 뺏는다는 거다. 이번 주 경주에서 동북아 질서의 30년을 가늠할 한미, 미중 정상회담이 잇따라 열리고, 정부 어디선가는 AI 시대와 민생 복지 정책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하지만 정치인 싸우는 영상에 빠져든 대중은 무거운 주제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우리가 너무 심했다”는 자성은 없다. 당 원로나 어른들도 뒷짐만 지고 있다. “의원들이 상임위에서 싸울 때 보좌관들이 휴대전화로 영상 찍으러 따라다니는 게 정상이냐”는 지적이 안 들린다. 200년 전 나왔던 ‘독일 국민에게 고(告)함’ 강연 시리즈처럼 국회의장, 당 대표를 지냈던 이들이라면 피를 토하듯 촉구해야 하지 않나.
좋은 정치에 목마른 유권자들은 작은 일에도 감동할 준비가 돼 있다. 정치가 먼저 허리 낮추고, 무릎 구부리는 걸 보고 싶어 한다. 욕심 덜어내고, 관조하고, 손 먼저 내밀며 자연과 하나가 되려는 시인들의 태도가 우리 정치에서 발붙일 곳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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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련 논설실장 sr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