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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선 기관사가 된 탈북 병사의 꿈[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입력 | 2022-08-21 09:00:00


지하철 2호선 기관사 한용수 씨.

1995년 초겨울.

북한 강원도 금강군과 김화군 사이에 있는 우두산(948m) 정상의 진지에서 북한군 병사들이 남쪽에서 날아온 삐라 한 장을 놓고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삐라에는 ‘대한민국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 자동차 등록대수 1000만 대 이상. 4명 중 1명이 자동차를 소유’라는 글이 사진과 함께 적혀 있었다. 자동차 1000만 대는 알겠는데, 1만 달러가 도대체 어느 정도 액수인지 가늠할 수 있는 군인이 없었다.

“어이, 상등병 한용수 여기 오라. 너는 집에서 달러를 좀 만져봤다니 1만 달러면 어느 정도 액수인지 알 수 있갔지?”

1990년대 초반만 해도 북한에선 달러를 구경해본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산이 많고 먹을 것이 없어 악명 높은 강원도 주둔 1군단과 5군단엔 북한에서도 가장 가난한 집 자식들이 많이 복무했다. 금강군 주둔 1군단 13사 소속 한용수 상등병은 그런 부대 환경 속에서 달러의 가치를 아는, 많지 않은 병사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입대하기 전 살았던 함흥의 외화상점 앞에선 1달러가 북한 돈 100원으로 암거래됐다. 당시 평범한 노동자 월급이 100원 정도였으니 이는 곧 1달러가 노동자 한 달 월급과 맞먹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1만 달러는 우리 돈으로 바꾸면 100만 원이고, 노동자 1만 개월 치 월급이니까 830년쯤 일해서 꼬박 모아야 되는 돈입니다.”

상상이 안돼 눈을 끔뻑거리는 고참들에게 한 마디 더 했다.

“제가 입대하기 전에 함흥에서 아파트를 1만5000원이면 샀는데, 1만 달러면 아파트 70채 정도 사겠네요.”

“야 임마, 후라이까지 말라우. 저 남조선 아새끼들이 일년에 그렇게 많이 번다고? 거짓말도 그럴 듯해야 믿지.”

고참들은 도통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한 씨 역시 남조선이 그렇게 잘 산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탈북을 꿈꾸다
한 씨가 근무하는 곳에선 한국의 화천댐이 멀리 보였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그 댐을 기준으로 한국군 7사와 21사가 북한군을 경계하고 있었다.

남쪽이 얼마나 잘 사는지는 몰라도 북한군보단 낫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증거는 발견할 수 있었다.

우선 아무리 적진을 살펴봐도 한국군은 삽질과 곡괭이질을 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북한군은 근무 시간을 빼곤 진지 정리니, 철조망 정리니, 길 정비니 하며 삽과 곡괭이를 메고 다녔다. 또 북한군은 물자를 등짐으로 메고 2시간 동안 고지로 올라오는데 비해 한국군 진지엔 헬기로 물자를 싣고 오고 그걸 차로 다시 싣고 갔다.

쌍안경을 통해 본 한국군의 영양 상태 역시 아주 좋아보였다. 남조선은 헐벗고 굶주리는 사회라고 교육을 받았는데, 그건 북한군에 해당되는 말 같았다. 당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북한군에선 무리로 영양실조 환자들이 발생했다. 1992년 8월 입대한 한 씨의 동기들은 입대 후 1년 동안 신병 훈련을 한다는 핑계로 병영 공사만 시켰다. 강원도 그 엄동설한 강추위에도 12월에야 겨울 동복을 지급받기도 했다.

군인들이 영양실조로 픽픽 쓰러져갔지만 아버지 직업에 따라 처리도 달랐다. 그의 입대 동기 중엔 평양의 노동당출판사 문헌국장 아들도 있었다. 평양외국어학원을 나와 입당하기 위해 어려운 곳으로 자원입대했지만 한 달도 버티지 못했다. 그가 영양실조에 걸리자 아버지가 내려와 아들을 데리고 갔다. 그 동기는 다시 볼 수 없었다. 반면 가난한 집 자식들은 죽어도 너무 외진 곳에 부대가 있어 집에서 시신을 찾으러 오지도 못했다.

이걸 보며 그는 생각했다. “아니, 간부 집 자식일수록 당과 수령에게 더 충성해야 하는데 자기들은 먼저 도망치고 쉬운 곳에 가다니. 그리고 이런 특혜를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군과 사회가 문제가 아닌가.”

한 씨는 남쪽을 바라보며 “저기는 어떤 곳일까, 저기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됐다. 경계 근무를 서러 나가서는 “내가 간첩이라면 어디로 침투할까. 내 눈에 안 보이는 그런 곳이 도망가기도 좋은 곳이 아니겠나” 싶어 주변 지형을 계속 유심히 관찰해보는 습관도 생겼다.


귀순 직후인 1996년 태극기 앞에서 사진을 찍은 한용수 씨.




탈북을 실행하다
1995년 6월 12일.

드디어 기회가 왔다.

북한군 최전방 경계는 3인1조 또는 2인1조로 이동한다. 이런 까닭에 도망을 치면 즉시 발각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달엔 갑자기 진지 방어공사와 내무반 공사가 겹쳤다.

병사들은 야간잠복에서 철수하면 낮엔 공사를 해야 했다. 일과표대로라면 낮엔 낮잠을 자야 하지만 일과가 제대로 지켜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고참이 불렀다.

“한용수, 오늘은 산에 올라가 나물을 뜯어와.”

부식물이 없어 병사들이 교대로 올라가 산에서 나물을 뜯어 활용했는데, 이것도 평소라면 조를 짜서 이동해야 했지만 작업 인원이 부족해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는 점심용 쌀이 든 배낭을 메고 오전 9시쯤 혼자 산에 올랐다. 최전방은 나물을 뜯을 때도 총과 수류탄 등 완전무장으로 움직여야 했다.

산에 오르며 생각해보니 입대 후 3년 동안 혼자 병영을 나온 것이 처음이었다. 나물 캐러 갔으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누가 찾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전방 철책 쪽으로 향했다.

철책 근처에서 그는 남쪽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탈북을 하려면 경계가 해이해지는 낮이 훨씬 안전했다. 야간엔 경계 근무를 서는 병사들의 신경이 훨씬 날카로워진다. 그의 입대 동기는 동료들의 총에 맞아죽기도 했다. 경계근무를 서던 중 용변을 보려고 잠시 자리를 이탈했다가 돌아오던 중이었는데, 밤에 간첩으로 오인 받았던 것이다. 배고파 쌀을 꺼내 군용 밥통에 밥을 해먹으며 계속 생각을 해봤지만 쉽게 결단이 서지 않았다.

갑자기 골짜기에 대남방송 확성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오후 3시였다. 시계가 없어 시간을 알 수가 없는 전방에선 대남방송이 곧 시계 역할도 했다.

그 소리를 듣자 그는 더는 지체할 여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평소 봐두었던 골짜기로 내려갔다. 장마 때 철조망이 휩쓸려 내려가기 때문에 계곡 개울 위 철책은 일정한 높이를 두고 들려있었다. 철조망을 통과하면 지뢰밭이 나타난다. 그는 강가의 돌 위로 조심스럽게 걸었다. 혹시 몰라 갈대도 꺾어들었다. 언젠가 고참이 갈대를 먼저 휘두르면 말뚝지뢰를 연결한 선에서 기타줄 소리가 난다고 알려준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튕’하는 소리가 울리면 조심히 줄을 찾아 넘어갔다.

한참을 계곡을 따라 내려가자 최전방 민경 초소와 경계 근무를 서는 병사가 보였다. 민경 초소는 200m 정도 빙 에돌아 통과했다. 마침내 북한강 앞에서 마지막 철조망을 만났다. 장마에 쓰러져 있는 채로 보수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 앞에서 그는 다시 30분 정도 앉아있었다. 이제 강을 헤엄쳐 넘으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가족 생각이 무거운 돌덩이처럼 그를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2007년 한용수 씨가 제주도에서 휴가를 즐기던 중 찍은 사진.




점심은 북에서, 저녁은 서울에서
한 씨는 함경북도 연사군 신양노동자구에서 태어났다. 주변을 둘러봐도 산밖에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임업에 종사했다.

그렇지만 그의 부모는 북한에서 좋은 대학을 나온 엘리트였다. 부친은 평양의대를 졸업했고, 모친은 만경대혁명학원을 거쳐 원산농업대학을 나왔다. 이들 부부는 어렵고 힘든 곳에 청년들이 지원해야 한다는 노동당의 방침에 호응해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산골로 자원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산골마을 치과의사였고, 어머니는 중학교 생물 선생이었다.

한 씨가 5살 때인 1980년에 당국에서 리비아에 파견할 의사를 모집했다. 부친은 여기에 지원해 1987년까지 리비아에 의사로 나가 있었다. 그동안 모친 홀로 누나와 형, 그와 남동생 4남매를 키웠다.

한 씨가 12살 나던 1987년 아버지가 귀국했다. 귀국하면서 함흥구강예방원 의사라는 직업을 얻은 뒤 가족을 불렀다. 한 씨 가족은 대도시 함흥에서 살게 됐다.

아버지가 벌어온 외화 덕분에 식구는 나름 풍족하게 살았다. 달러를 들고 외화상점에 가서 외국제 물건을 사오기도 했다.

한 씨는 아버지가 들려주는 리비아 이야기를 들으며 바깥세상엔 잘 사는 나라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머니 역시 6.25전쟁 때 만경대혁명학원을 다니다 중국으로 피난을 가 1957년까지 살았는데, 중국에서 살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추억했다. 한 씨의 학교엔 부모가 다 외국 경험을 해본 학생은 없었다. 부모의 영향으로 한 씨는 자라면서 외국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됐다.

1992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가게 됐을 때 집에선 군사동원부(병무청)에 별다른 로비를 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돈이 좀 있는 집은 뇌물을 써서 자식을 군 복무하기 편한 곳에 보내려하지만 한 씨 부모들은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 한 씨는 돌을 열 개 던지면 일곱 개가 군인 머리에 떨어진다는 강원도 1군단에 가게 됐다. 그리고 입대 3년 만에 자유의 세상을 향해 부대를 탈출한 것이다.

강 앞에서 가족 때문에 30분을 머뭇거렸지만 다시 돌아가자니 그것도 불가능해보였다. 지뢰밭을 다시 통과해 부대까지 가기도 너무 어려웠고, 또 발각이라도 되면 인생이 끝장날 수밖에 없었다.

“에이, 까짓 거. 그냥 가지 뭐”

한 씨는 메고 왔던 총과 수류탄을 강가에 벗었다. 여기까지 올 동안엔 혹시 있을 모를 교전을 각오하며 무기를 휴대했지만 강을 넘어 남쪽에 도착하면 무기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총알이 날아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비무장 상태라면 훨씬 안전할 것 같았다. 강을 헤엄치기엔 총이 무거운 이유도 있었다. 한국군 초소에 도착하면 흰 면내의를 벗어 흔들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는 북한강에 뛰어들었다. 강을 무사히 건너 한국군 최전방 감시초소(GP)를 향해 골짜기를 타고 올라갔다. 남쪽은 지뢰밭이 어디 있는지 몰라 그냥 정신없이 올라만 갔다. 한국군 초소에 도착했는데 사람이 없었다.

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기다렸는데도 사람이 나올 기미가 없었다. 그는 돌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군인 한 명이 문을 열었다.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던 군인은 안에다 뭐라고 소리쳤고, 그제야 병사들이 우르르 나왔다. 그는 병사들과 함께 내무반에 들어갔다. 포박하지도 않았다. 젖은 옷을 벗게 하고 운동복을 주며 입으라 했다.

그때가 저녁 6시경이었다. 좀 있더니 헬기가 날아왔다. 그가 북한군 초소에서 늘 보며 부러워하던 헬기였다. 막상 헬기를 타니 좋을 줄 알았는데 시끄럽다는 생각만 들었다.

헬기가 향한 곳은 경기도 성남의 비행장이었다. 서울 상공에 이르렀을 때 정훈장교가 물어봤다.

“서울 상공이 멋있죠?”

“평양도 이래요.”

그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나중에 차로 63빌딩 앞을 지날 때 조사기관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빌딩이라고 설명하자 그는 “평양에도 105층이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대답해 놓고 보니 북한이 싫어서 왔는데, 그 와중에 북한을 편드는 듯한 말을 하는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성남에서 내린 뒤 서울 동작구에 있는 조사기관까지 도착하니 밤 9시가 됐다.

그제야 기다리던 밥이 나왔다. 점심은 북한에서 먹고 저녁은 서울에서 먹게 된 것이다.

하지만 밥이 조그마한 공기에 쪼끔 나왔다.

식판을 보며 그는 생각했다.

“유치원생도 아니고, 요것만 주다니. 배고파 죽겠네.”

열차 기관실에 앉아 있는 한용수 씨.




지하철공사에 취직하다
조사 과정은 무려 7개월이나 걸렸다. 그때는 한국에 오는 탈북민도 거의 없을 때라 북한군에서 근무한 사람은 조사기관에 오래 붙들어두고 정보를 캐물었다. 가끔 국정원이나 국군, 미군부대에 가서 물어보는 것들을 대답하기도 했다.

그렇게 오래 조사를 받은 뒤 1996년 1월 사회로 나오게 됐다. 지금은 탈북민이 하나원이라는 정착 지원 교육기관을 거치지만 그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어느 지역에 가고 싶냐고 묻자 한 씨는 “서울만 빼고 아무데나 보내주세요”라고 대답했다. 그가 7개월 경험한 서울은 너무 시끄러웠다.

하지만 정작 그에게 배정된 것은 서울 강서구 가양동의 임대아파트였다. 조사기관을 나올 때 주소지가 서울 방배동으로 돼 있어서 신변 보호는 방배경찰서가 담당했다.

처음 마주 앉았을 때 담당형사는 “이제 대한민국 국민이 됐으니 취직해 돈을 벌고 살아야지. 어떤 일을 제일 잘 하냐”고 물었다.

마침 둘이 만났던 건물 밖에 고가도로가 건설되고 있었다. 공사장을 바라보다가 한 씨는 “삽질, 곡괭이질 잘 합니다”고 대답했다. 실제로 북한군에 입대해서 탈북하기 전까지 가장 많이 했던 일이기도 했다.

담당형사는 그를 데리고 고가도로 현장소장에게 찾아갔다. 현장소장은 처음엔 안 된다고 했지만 쉬는 시간마다 형사가 찾아가 사정하니 와서 일을 하라고 했다.

일단 ‘노가다’ 자리는 얻었지만 이걸 평생 할 수는 없었다.

마침 방배 관할지역에 서울지하철공사(현 서울교통공사) 본사가 있었다. 형사는 이번엔 공사를 찾아가 공사 시험 때 서류를 내라는 답변을 받았다.

시험을 치고 5개월 기다린 끝에 마침내 한 씨는 서울지하철공사 2호선 역무원으로 입사하게 됐다. 첫 업무는 매표소에서 일하며 표를 팔거나 기기를 수리하는 것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21살이었다. 입사할 때 공사 간부가 그에게 말했다.

“우리 공사 직원이 1만2000명인데, 당신이 그중에서 제일 어려요.”

실제로 그랬다. 한 씨는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등록금이 비싸 포기했다. 주변 사람들이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고 했지만 자존심이 내키지 않았다.

“교회는 하나님 믿으려 가는 곳이지 도움 받으려 교회 다니면 부끄러운 일이죠. 내가 거지도 아니고.”

그는 그렇게 노동을 선택했다.

그는 북에서 사회 경험이 없었다는 것이 어쩌면 다행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제부터 배우는 것이 곧 그가 겪어야 할 사회 생활이기 때문이다.


350원짜리 눈물의 딸기우유
한국 정착은 쉽지 않았다. 돈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것이 제일 문제였다. 사회에 나올 때 정착금 2500만 원이 든 통장을 받았지만, 돈을 허투로 쓸 것 같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통째로 맡겼다. 그러고 나니 수중에 돈이 하나도 없어 일해서 벌어야 했다.

한 번은 사회에서 알게 된 친구가 손가락을 다쳤는데 수술비가 없다고 했다. 그때 그의 월급이 100만 원이었는데, 수술비는 250만 원이나 됐다. 그는 선뜻 사채를 빌려 수술비를 마련해줬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됐다. 이자가 무섭게 늘어나더니 계속 사채업자가 찾아와 독촉했다.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몰리자 그는 직접 사채업자 사무실로 찾아갔다.

“난 귀순 병사인데, 돈이 하나도 없습니다. 갚을 정도의 이자를 받아야지 이렇게 하면 나를 때려 죽여도 돈을 갚지 못 합니다.”

사장이 그를 어이없이 쳐다보다 생각하더니 “너 이 돈이 어떤 돈인 줄 알고 썼냐. 앞으로 사채는 절대 쓰지 마라. 그리고 빌려간 돈은 매달 나눠서 원금만 갚으라”고 했다. 사무실을 나오며 그는 “사채업자는 조폭인줄 알았더니 이런 사람도 있네”라고 생각했다. 그 돈은 10개월에 걸쳐 다 갚았다.

북한에서 온 형도 알게 됐다. 의지할 데 없었던 그들은 형제처럼 가까워졌다. 형이 어느 날 사업을 한다고 해 2000만 원을 빌려줬다. 하지만 그 형의 사업은 망했고, 그는 감옥에 갔다. 출소해 나온 그의 몰골을 보고 마음이 아파 또 500만 원을 주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한강에 돌 던지기였다. 이후에도 계속 사업을 한다며 그에게 돈을 빌려 쓰곤 또 감옥을 가는 일이 반복되던 형은 결국 끝내 외국으로 도주했다. 나중에 그에게 빌려준 돈을 계산해봤더니 1억2000만 원이나 됐다.

돈을 빌려줄 정도로 여유 있게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직장에 다니기 시작한지 1년 뒤 외환 위기가 찾아왔다. 1998년 어느 날 월급이 나올 때까지는 1주일이 남았는데 주머니에 2000원 밖에 없었다. 2000원을 들고 그는 1주일을 어떻게 살지 생각했다.

퇴근할 때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가양동 집까지 가야 했다. 당시 버스요금이 350원이었다. 그런데 버스를 타고 가면 먹을 것을 살 돈이 없다. 고민 끝에 그는 슈퍼에서 350원에 파는 딸기우유를 샀다. 매일 딸기우유 1팩을 먹는 대신 당산에서 가양 집까지는 걸어가기로 했다.

주변에서 돈을 좀 빌려 그 위기를 극복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남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말을 죽어도 못하는 성격이었다. 지금까지도 그는 남에게 돈을 빌려본 일이 없다.

한용수 씨의 표정에선 당당한 사회 일원으로 자리 잡은 자부심이 배어나온다.




26년 동안 2호선에서만 근무하다

한 씨는 1996년 서울지하철공사에 입사해 지금까지 26년째 한 직장에서 근무하고 있다. 역무원 시절에도 구로공단역을 시작으로 방배역, 잠실역 등을 옮겨 다니며 근무했지만 2호선을 벗어난 적이 없다.

2000년 공사에 순환보직제가 도입됐다. 외환위기 때 구조조정을 한 까닭에 인력이 모자라자 역무원인 운수사무직도 운전직에 지원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는 철도의 꽃은 기관사라고 생각해 운전직에 지원했다.

2003년 마침내 차장으로 발탁됐다. 차장은 맨 뒤 기관실에 타고 있다가 승객들이 다 오르면 기관사에게 출발 신호를 보내는 일을 한다. 차장을 하면서 열심히 공부를 해 기관사 자격을 땄고, 2017년 마침내 2호선 기관사 보직을 부여받았다.

2호선은 노선을 한바퀴 도는데 1시간 반이 걸린다. 그는 매일 출근해 3바퀴를 운전한다. 2호선 기관차만 20년 가까이 타다보니 이젠 터널 위에 박힌 벽돌 위치까지 기억할 정도다. 기관사에겐 운전하다가 뭔가 새롭다는 느낌이 들면 그건 뭔가 잘못됐다는 의미다. 항상 같은 풍경을 보며 어두운 터널을 도는 일이 지겨울 법도 하지만 2호선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2호선의 하루 수송 인구는 200만 명이 넘어요. 단일 노선으로 이렇게 많은 승객을 수송하는 지하철은 도쿄 지하철에 이어 세계 2위일 겁니다. 2호선에서 기관사를 하면 전 세계 어딜 가서도 기관사를 할 수 있어요. 서울교통공사가 적자라고 하지만 2호선만 떼어내 보면 흑자 기업입니다. 우리가 공사를 먹여 살린다는 자부심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딴 노선에 옮겨간 사람들이 여기가 편하다고 오라고 해도 이런 자부심 때문에 그는 2호선을 계속 지키고 있다.
기관차를 몰고 북으로
한국에 처음 왔을 때 그는 군인이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조사 과정에 그 이야기를 하자 조사요원이 “너 또 도망가면 어떻게 하냐”며 웃었다. 탈북한 북한 병사가 한국군에 복무할 규정도 없었다. 그래서 꿈을 접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 그 꿈은 딸에게 옮겨갔다. 한 씨는 2000년 같은 탈북민 출신의 여성을 만나 가정을 이뤘다. 2002년 유일한 자식인 딸이 태어났다. 지금 그 딸은 대학 2학년으로 성장했다. 군사학과를 다니며 부사관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한 씨는 아버지의 꿈을 딸이라도 이룰 수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처음 정착했을 때 학연, 지연, 혈연 등으로 연결된 한국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다. 그때마다 그는 혀를 깨물었다.

“이런 사람들과 경쟁하려면 내가 조금 더 잘하는 것으론 안 되겠구나. 더 열심히 살아야겠군.”

회사에 다니며 생활이 안정됐지만 항상 마음엔 대학에 다니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원하던 보직도 얻었고, 가정도 꾸렸고, 집도 샀지만 한국에서 배우고 싶은 열망은 점점 더 커졌다. 마침내 그는 2010년 명지전문대 철도전기학부 전기과에 입학했다. 서울교통공사와 명지전문대가 서로 교육협약 관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2년 반을 다녀 졸업한 뒤 내친김에 전공심화 과정을 2년 더 다녀 학사 자격을 얻었다.

학사 자격을 딴 뒤 한양대 철도시스템 대학원에 입학해 2017년 석사학위도 받았다. 그의 배움에 대한 꿈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20년엔 동양대 경영학 박사과정에 입학해 지금 3학기 째 다니고 있다.

굳이 기관사를 하면서 박사까지 획득하려는 이유가 뭘까.

“생활이 안정되니 내가 여기에 밥만 먹고 살려 왔냐는 생각이 들었죠. 목숨 걸고 온 길인데 의미 없이 살면 안 된다고 늘 생각했고, 제가 기관사다보니 그 의미를 철도에서 찾게 됐습니다. 지금도 남북 간에 회담을 하면 철도 연결 문제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철길을 연결한다고 열차가 바로 운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운영 시스템까지 통합해야 하는데, 만약 통일 이전에 남북 철도가 연결된다고 하면 그 일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남북 정치 상황이 나빠져 서로 왕래가 단절돼도 철도는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사실 그의 진짜 꿈은 기관차를 끌고 북에 올라가는 것이다. 탈북민이 한국의 기관사로 기차를 몰고 북한 땅을 다시 밟아보는 것이 희망인 것이다.

“제가 기관차를 몰고 북에 가는 것이 전혀 실현 불가능하다고 보진 않습니다. 어쨌든 그러려면 남북 철도가 우선 연결돼야겠죠. 그런 작업부터 참여하고 싶어 박사까지 공부하며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습니다.”

2호선은 매일 수백 만 명의 사람들로 북적인다. 수많은 꿈을 싣고 열차는 빙빙 돌고 또 돈다. 한 씨의 꿈도 오늘 어느 열차에 함께 타고 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