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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위기가 기회”…원격근무-유동성 증가에 불붙은 美 ‘창업 러시’

입력 | 2022-01-03 18:46:00

AP 뉴시스


미국 뉴욕 기반의 스타트업 ‘블랭크스트리트’는 겉보기에는 특별할 것 없는 커피 체인이다. 하지만 노점이나 이동식 카트의 소규모 점포 형태로 임차 비용을 줄여서 스타벅스 같은 경쟁사와 차별화했다. 특히 스타벅스에 비해 20~30% 싸면서 비교적 높은 품질의 커피를 파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으로 사람들이 비대면을 선호하는 경향은 테이크아웃 전용 매장이 많은 이 기업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20대 청년 두 명이 지난해 여름 창업한 이 회사는 최근 점포가 20곳 정도로 불어나면서 벤처 투자자의 뜨거운 ‘러브콜’을 받고 있다. 지난해 가을 2500만 달러(약 298억 원)를 유치한 지 석 달 만인 지난해 12월 3500만 달러 투자를 또 약속받았다. 최근 1년 사이 세 번째다. 창업자 비나이 멘다 씨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우리는 자본을 활용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며 “사업자금 확보가 과거보다 훨씬 쉬웠다”고 말했다.

최근 미국에선 유동성 증가로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시장의 투자 열기를 활용해 팬데믹 시대 달라진 라이프스타일을 겨냥하는 ‘팬데믹 창업 러시’가 이어지면서 신규 사업체가 급증하고 있다. 디지털 기술과 원격 근무를 적극적으로 적용해 창업 비용을 크게 낮춘 스타트업들이 새로운 사업 기회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2일(현지 시간) 본보가 미국 통계청 자료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1~11월 미국 창업 건수는 497만 건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팬데믹 이전인 2019년 같은 기간(약 320만 건)보다 55% 늘어났다. 창업 건수는 2020년 중반까지만 해도 매월 30만 건이 채 안 됐지만 지난해에는 매월 40만 건을 훌쩍 넘어섰다.


지난해 4월 미국의 우간다 출신 자매가 공동 설립한 ‘퀵하이어’는 구직자와 회사 간 일자리를 연결해주는 애플리케이션(앱) 회사다. 일반적인 취업 중개 회사와 다른 점은 음식점, 소매업 등 서비스업 일자리 중개에 특화됐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서비스업 종사자가 1억 명이 넘는데 정작 지금까지 취업 중개는 화이트칼라 직종 수요만 충족시켰다”는 이유에서다. 창업자인 앤절라 무훼지홀, 데버라 글래드니 씨는 미 CNBC방송에 코로나19 대유행으로 기업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을 때가 사업 적기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퀵하이어는 최근 스타트업 업계에서 다시 조명받고 있다. 서비스업체 구인난이 심각해지면서 새로 직원을 구하려는 기업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 기업은 지난해 11월 투자 자금 141만 달러(약 16억8000만 원)를 새로 유치했다고 발표했다. 흑인 여성들이 세운 기업으로는 이례적인 일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현재 미국 중서부 캔자스주에서만 사업하는 퀵하이어는 올해 중서부 전역으로 영역을 확장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 팬데믹 시대 라이프스타일 겨냥한 창업 붐
이처럼 미국 스타트업 창업가들은 위기를 기회로 활용해 ‘팬데믹 창업’에 나서고 있다. 새 변이 오미크론 등장으로 고사 위기에 빠진 여행업계도 마찬가지다. WSJ는 “여행 스타트업들은 예약 시스템 유연화와 아파트 숙박 활용, 비접촉 호텔 체크인을 비롯한 새로운 서비스를 도입하고 있다”면서 “오미크론이 이들에게 오히려 사업 기회를 만들어주고 있다”고 보도했다.

스타트업을 향한 투자 자금도 밀려들고 있다. 금융정보업체 피치북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해 1월부터 12월 15일까지 미국 초기 단계 스타트업에는 사상 최대인 930억 달러(약 111조 원)의 투자 자금이 몰렸다. 2016년 300억 달러보다 두 배 이상 많고, 지난해 520억 달러의 두 배 가까이로 늘어난 규모다. 자금이 몰리면서 스타트업 기업가치 중앙값은 2020년 1600만 달러에서 지난해 2600만 달러로 불어났다.

미 전문가들은 팬데믹이라는 전대미문의 경제 위기가 창업 증가로 연결된 이유로 유동성 증가에 따른 투자 급증 이외에도 여러 요인을 꼽고 있다. 우선 지난해 팬데믹 초기 쏟아진 수많은 실직자 중 상당수가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창업 전선으로 이동했다는 설명이 나온다. 미국에서는 직장에서 자발적으로 퇴사하는 사람이 매월 400만 명이 넘는 등 구인난이 극심하다. 따라서 이들 인력 상당수가 창업을 선택하고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특히 최근엔 투자와 저축으로 ‘실탄’을 든든하게 갖춘 채 사업가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더 늘어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미 언론들은 미국에서 ‘기업가 정신’이 부활한 배경으로 심리적 요인에도 주목한다. 코로나19로 가족과 친지를 잃고, 직장을 잃은 비극적 경험이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고 도전 정신을 키우게 만들었다는 얘기다. 미국 중소기업 자문기구 ‘스코어’에서 멘토로 활동하는 프랭크 라모나카는 NBC방송에 “팬데믹은 사업하려는 사람들에게 예기치 못한 ‘기회의 창’을 제공했다”며 “이들은 자기 직업의 미래를 재평가하는 시간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 디지털 기술 적용으로 창업 비용 줄어
특히 디지털 기술의 발달이 창업 증가를 견인한 것으로 풀이된다. 팬데믹으로 원격 근무를 도입한 기업은 굳이 직원이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더라도 업무가 잘 돌아간다는 것을 파악했다. 전에 없던 재택근무 옵션이 생기면서 인재를 구하기 쉬워지고 사무실 임차료 등 창업비용도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시장 유동성이 늘어나 자금 확보가 용이해진 점, 팬데믹을 계기로 실업급여와 고용 지원 등 두터운 ‘창업 안전망’이 생긴 것도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게 된 요인으로 꼽힌다.

미국 산업전문가들은 이 같은 스타트업 붐을 반기고 있다. 미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신규 사업체 수가 낮은 수준에서 오랫동안 지속되는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을 겪었다. 다만 스타트업 창업 러시 추세가 오래갈지 낙관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글로벌기업가정신네트워크(GEN) 수석 고문 데인 스탱글러는 경제전문지 포브스에 “신규 사업체가 많아지면서 일단 올해에는 도산하는 기업도 크게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