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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 어폰 어 타임 인… 2000년대[임희윤 기자의 죽기 전 멜로디]

입력 | 2020-02-21 03:00:00


봉준호 감독의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 (2000년)의 한 장면. 그는 독특한 연출력으로 2000년대 영화의 흐름을 이끌었다.

임희윤 기자

“저는 영화 좋아해요. 특히 2000년대 영화요.”

19일 저녁, 1994년생 음악가 S와 저녁을 먹다 그의 말에 잠시 두 귀를 의심했다. ‘1960년대 영화나 1990년대 영화도 아니고. 2000년대 영화라….’ 2000년대라는 말 자체가 2010년대라는 말의 결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이리라. 다시 말해 단위로서 ‘데케이드(decade·10년)’라는 인식은 있지만, 그것이 하나의 시대나 시절이라고는 잘 생각되지 않는, 그러기에는 너무 가까운 과거인 시기.

S는 좋아하는 2000년대 영화로 봉준호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2000년),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2003년)를 꼽았다. 다시 찾아보니 ‘플란다스의 개’의 대표 홍보 문구가 놀랍다.

‘2000년대의 상상력! 2000년대의 코메디!’

#1. 음원 서비스 ‘스포티파이’를 즐겨 쓴다. 장르별, 시대별, 분위기별 플레이리스트(추천 곡 목록)가 풍성한 게 장점이다. 얼마 전, 눈을 비비며 본 플레이리스트가 있다. 제목은 ‘2000‘s Nostalgia’(2000년대 향수). 2020년, 즉 올해에 생성된 것으로 돼 있다. 레이디 가가의 ‘Bad Romance’를 필두로 궨 스테퍼니, 니요, 힐러리 더프, 블랙 아이드 피스, 에버네센스 등의 음악가 이름이 즐비하다. 그러고 보니 이게 다 추억이다. 비슷한 느낌을 가진 ‘Class of ’00’이란 모음집을 임의재생했다가 미국 록 밴드 크리드의 ‘With Arms Wide Open’이 흐르는데 나도 몰래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아, 나의 2000년대여….’

#2. 대중음악계에는 대체로 20년, 또는 30년 주기로 리바이벌(부활, 재유행) 붐이 인다. 1960, 70년대 숨은 보석이었던 영국 싱어송라이터 닉 드레이크(1948∼1974)는 사후 25년 뒤인 1999년, 미국에서 대표곡 ‘Pink Moon’이 폭스바겐 광고에 실리면서 음반 판매량이 12배 이상으로 폭증했다. 2000년대를 풍미한 ‘포스트 펑크·개러지 록 리바이벌’ 움직임은 영국의 악틱 멍키스, 프란츠 퍼디낸드 같은 그룹을 슈퍼스타로 만들었다. 1960년대의 거친 록과 1980년대 ‘포스트-펑크’ 장르에 대한 향수를 재해석한 흐름이었다.

#3. 2020년대가 도래했으니 이제 2000년대 붐이 불기에 충분하다. 20년 주기, 30년 주기의 리바이벌 경향은 왜 유효할까. 그것이 핼리혜성의 공전주기만큼이나 믿음직스러워진 이유는 뭘까. 미국의 공연 입장권 판매 사이트 ‘틱픽’은 최근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제목은 ‘부모와 자녀가 서로의 음악 취향에 영향을 미친다’다. 490쌍 이상의 부모, 500명 이상의 어린 음악 팬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다.

#4. 연구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이 ‘평생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를 접하는 나이가 13세였다. 흥미로운 것은, 성인용 가사를 담은 노래에 처음 노출되는 시기가 이와 비슷한 평균 12.5세라는 것. 노출의 주체는 놀랍게도 부모인 것으로 보인다. ‘틱픽’이 부모들에게 ‘자녀의 음악 취향에 영향을 미치려고 주로 들려주는 장르’를 물었더니, 하드록, 고전 록(classic rock), 헤비메탈을 꼽았다. 3분의 2에 달하는 부모가 ‘아이의 음악 취향에 영향을 끼치려 노력해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5. 최근 양준일 신드롬, 탑골가요 붐에서 보듯 1990년대에 대한 향수도 짙다. 미국에서도 2010년대부터 현재까지 이런 흐름이 거세다. 근년에 대유행인 이모 랩(emo rap) 장르 음악에는 1990년대 얼터너티브 록에서 가져온 기타 사운드와 정서가 휘몰아친다. 래퍼 릴 핍(1996∼2017)은 커트 코베인(1967∼1994)을 동경해 ‘Cobain’이라는 곡을 발표했고 실제로 ‘로파이(lo-fi) 랩계의 커트 코베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6. 음악가 S에게 ‘2000년대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를 물었다.

“글쎄요. 성장하고 공부하느라 2000년대를 제대로 만끽하지 못했어요. 당시엔 어려서 콘텐츠를 해석하는 혜안도 부족했을 거고요. 그 영화들을 지금 다시 보면 독특한 감정에 휩싸이거든요. 익숙한데 낯선, 과거 같은 미래의 느낌이랄까. 아니면 미래 같은 과거이거나….”
 
임희윤 기자 i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