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아이트립(eye trip)’으로 만족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화창한 5월의 첫 날을 방구석에서 보낼 수 없었다. 궁리 끝에 북한산을 가자고 했다. 아내는 다시 스마트폰으로 북한산 초보자 코스를 부지런히 검색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벼운 마음이었는데, 우리 계획에 동참하기로 한 편집자 친구의 한 마디에 긴장되기 시작했다. “북한산은 어디로 가든 바위투성인데 등산화도 없다고요?”
부랴부랴 등산화를 마련하고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쓰던 배낭과 스틱도 빌렸다. 구파발역 앞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형형색색 등산 장비로 중무장한 등산객 한 무리가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등산복까지 미처 챙기지 못한 우리 식구는 초대받지 않은 파티에 참석한 불청객 같았다. 등산객으로 발 디딜 틈 없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 생각했다. 아무리 국토의 절반 이상이 산이라지만, 등산 인구가 이토록 많은 데에는 까닭이 있지 않을까. 문득 체코의 미디어 철학자 빌렘 플루서의 저서 ‘몸짓들’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부정하기 힘든 얘기다. 대부분 ‘무엇을 위해, 왜’ 일하는지 되물을 겨를 없고, 조직(또는 자신이 속한 세계) 안에서 자신의 역할이 효과적이지 않으면 도태되기 십상이다. 모처럼 쉬는 날 가까운 산이라도 오르는 게 어쩌면 거의 유일한 존재 증명이 되고 만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조차 코스가 점점 가팔라지면서 감쪽같이 달아났고, 나는 “아이고, 죽겠네!” 소리만 연발했다.
존재 증명이고 나발이고, 등산은 일단 힘들다. 급기야 나는 더 이상 내 몸의 주인이 아닌 것만 같다. 무엇을 위해, 왜 산을 오르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나쁘지 않다. 꼭 정상에 오르지 않더라도 비난받을 일 없다. 말하자면 무엇을 위해, 왜라는 목적과 나의 쓸모로부터 그제야 제대로 해방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등산은 충분히 가치 있다.
원효봉에 올라 찌그러진 김밥을 나눠 먹을 때였다. 주변에는 평상복 차림의 어린 아이들이 고양이를 쫓으며 신나게 뛰어다녔다. 우리 집 아이가 말했다. “뭐야? 쟤들은 등산화도 안 신었네? 이 아이들은 원효봉까지 어떻게 올라온 거지?” 우리는 한바탕 크게 웃었다. 하긴, 누군가 등산화를 만들기 전부터 산은 이미 존재했다. 우리를 노예처럼 속박하는 일이 존재하기 전부터 우리가 이미 존재했듯 말이다.
권용득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