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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꽁 숨은 판결문… “前官들은 친분 이용해 쉽게 입수”

입력 | 2019-04-27 03:00:00

[위클리 리포트]전관예우 반칙-범죄 되풀이되는 이유는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출신 A 변호사는 한 달에 두 번꼴로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서관 3층의 ‘판결정보 특별열람실’로 향한다. 자신이 맡은 사건과 비슷한 판례를 찾아낸 뒤 구체적인 법리적 쟁점 등을 정리해 재판에 참고하기 위해서다.

인터넷으로 2주 전에 미리 예약을 하면 특별열람실 컴퓨터로 판결문을 열람할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은 컴퓨터가 4대에 불과해 예약은 순식간에 마감된다. 예약을 못 하면 어쩔 수 없이 오전부터 특별열람실에 와서 무작정 대기하다가 예약자가 없는 틈을 타 잠시 컴퓨터를 쓸 수밖에 없다. 열람실에서 제공하는 메모지에는 사건번호와 판결을 선고한 법원명만 적을 수 있고, 나머지 정보는 모두 암기해야 한다. 컴퓨터를 이용할 때는 휴대전화를 따로 보관해야 한다.

그런데도 특별열람실엔 변호사 경력 10년 이하 ‘새끼 변호사’들이 줄줄이 대기해 있다. 판결문을 원본으로 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A 변호사는 “판사 출신 전관 변호사들은 친분 있는 현직 법관을 통해 판결문을 받아보는데, 로스쿨 출신들은 특별열람실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또 “4시간을 기다렸지만 판결문을 검색한 시간은 15분밖에 안 돼 원하던 판결문을 못 찾은 적도 허다하다”고 했다.

○ 전관예우 방지는 판결문 전면 공개부터

판사나 검사 등이 변호사로 개업해 수임한 사건에 대해 유리한 처분이나 판결을 받는 전관예우(前官禮遇)를 해결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법조계에선 판결문 전면 공개를 전관예우 방지의 첫걸음으로 꼽는다.

최근 판결 동향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은 판결문을 통할 수밖에 없다. 현재 법원은 판결이 확정된 사건에 한해 비실명으로 판결문을 공개한다.

1, 2심을 거쳤지만 대법원에 계류 중인 사건은 공식적인 루트로는 판결문을 아예 찾을 수 없고, 판결이 확정됐더라도 실명으로는 판결문을 구할 수 없다. 개인정보 공개를 막기 위해 판결문의 비실명 공개가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부 전관 변호사들은 친분 있는 판사를 통해 ‘미확정 실명 판결문’을 손쉽게 열람한다. 자신이 맡은 사건의 판례를 찾는 데도 어려움을 겪는 이른바 ‘로변’(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은 “판결문이 공개돼야 전관 변호사와 공정한 변론 경쟁을 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판결문을 전면 공개하지 않는 것이 ‘재판의 심리와 판결은 공개해야 한다’고 규정한 헌법 109조에 위반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선진국에선 대부분 ‘미확정 실명 판결문’을 전면 공개한다. 공개 재판이 원칙이기 때문에 재판의 결과물인 판결문을 당연히 공개한다는 논리다. 미국은 판결 이후 24시간 내에 온라인 사이트에 미확정 판결문을 게재한다. 영국, 네덜란드는 미확정 판결문을 1주일 내에 공개한다. 판사와 변호사의 이름 등이 적힌 모든 판결문이 투명하게 공개되면 판사의 판결 성향이나 변호사의 승소율, 패소율에 대한 정보를 구체적으로 얻을 수 있다. 의뢰인들은 이 같은 데이터분석 결과를 참고해 변호인을 선임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굳이 판사와 연고가 있는 전관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

○ 헌법은 공개 재판 원칙

김명수 대법원장은 전관예우 근절책 중 하나로 올 1월부터 확정 판결문에 한해 비실명으로 적혀 있던 변호사나 법무법인 이름을 실명으로 공개하고 있다. 판결문의 변호사 이름이 공개되면 재판 절차 등이 좀 더 투명해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확정 판결문이라 여전히 한계가 있다.

현재 법원이 판결문을 공개하는 방법은 크게 3가지다. 그러나 방법이 불편하고 공개 범위가 제한적이라 이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판사라면 누구나 판결문을 열람할 수 있지만, 국민들과 변호사들에겐 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것이다.

첫 번째는 ‘판결정보 특별열람실’이다. ‘미확정 판결문’을 원본 PDF 파일로 볼 수 있지만 자리 경쟁이 치열하고, 해당 장소에서만 판결문을 볼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노력을 들인 극소수의 국민만이 열람할 수 있는 셈이다.

두 번째는 ‘대법원 종합법률정보 사이트’다. 확정 판결문 중 비실명화된 일부 판결만 볼 수 있어 사실상 무용지물이다. 2016년 9월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사이트엔 2010∼2015년 선고된 사건 930만3559건 중 2만4855건(0.3%)만 공개돼 있다.

세 번째는 ‘판결서 인터넷 열람제도’다. 홈페이지에서 특정 단어를 입력하면 해당 단어가 언급된 확정 판결문만 찾을 수 있지만, 형사 사건은 2013년 1월 이전, 민사 사건은 2015년 1월 이전 확정된 판결문은 아예 등록이 안 돼 있다.

○ 사설 업체 통해 판결문을 사는 변호사들

“저는 차라리 사설 법률정보 사이트를 이용합니다.” 서울 서초구에서 근무하는 B 변호사는 법원이 공식적으로 제공하는 판결문 공개 방법을 쓰지 않는다며 이렇게 말했다. 사설 법률정보 사이트 이용료로 한 달에 10만 원가량을 내는 것이 공식 루트를 통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사설 사이트가 제공하는 판결문은 보통 사건에서 이긴 변호사들이 비실명화한 뒤 판결문을 올린다. 현재 운영되는 사이트는 5개 미만인 것으로 알려졌다. 무료도 있지만 대부분은 판결문 제공 횟수나 이용 기간을 기준으로 요금을 받는다. 확정 판결문과 미확정 판결문이 모두 올라온다.

‘나 홀로 소송’을 하려는 국민들도 각종 어려움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대부분 온라인을 통해 판례를 알음알음 얻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최근엔 혼자 소송을 하는 이들이 서로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온라인 커뮤니티가 생기고 있다. C 변호사는 “일반 국민들은 사실상 판결문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봐야 한다”고 비판했다.

○ 판결문 공개에 국민은 80%, 판사 20% 찬성

국민들과 변호사들은 판결문 공개를 더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금 의원이 지난해 5월 국민 10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사 대상의 80.8%가 판결문 공개에 찬성했다. 대한변호사협회가 지난해 6월 변호사 1586명에게 조사한 결과는 93.7%가 판결문 공개를 지지한다고 했다.

반면 대법원이 지난해 4월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한 판사 1117명 중 미확정 형사사건 판결문 공개에 대해 찬성한 건 20.6%에 불과하다. 판사들은 대부분 ‘개인정보 보호’를 근거로 공개에 반대하고 있다. 판결문에는 소송 당사자의 주소 이름 주민등록번호 등이 기재돼 있다는 것이다.

판사들은 또 성폭력 사건은 피해 상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고, 기업 사건의 경우 영업비밀이 노출될 위험이 있다고 주장한다. 서울중앙지법의 D 판사는 “하급심 판결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므로 개인정보 보호 차원에서 공개 여부 자체를 신중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판결문이 공개돼야 판사들이 판결에 더 심혈을 기울인다는 반론이 법원 내부에서부터 나온다. 판결문이 공개될수록 판결 이유가 상세히 적히기 마련이고, 결과적으로 국민들의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높아질 것이라는 것이다. 서울지역의 E 판사는 “판결문 공개를 꺼리는 판사들은 본인의 판결에 대해 자신이 없는 것”이라고 했다.

○ 판결문 공개 등 제도 개선에 나서야

금 의원 등 13명은 2017년 2월 민사소송법과 형사소송법 일부 개정안을 통해 미확정 판결문을 공개하자고 입법을 제안했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국민은 누구나 미확정 판결문을 열람할 수 있지만 2년 넘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판결문 공개 범위를 넓히는 것 외에도 전관예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권이 더 발 벗고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찬희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은 25일 변협 전관비리신고센터의 상근 변호사가 전관 비리 및 법조 브로커를 적발하고, 관련 비리를 신고하는 변호사와 국민들에게 거액의 포상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법조계의 자생 노력을 제도적으로 정치권이 뒷받침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형근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사법부는 판결문을 전면적으로 공개하고, 전관 변호사들이 이해가 충돌하는 사건을 맡지 못하는 규칙을 도입하고 관행 개선을 시작해야 한다. 국회는 전관 변호사들의 재취업을 더 강하게 규제하는 법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