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왼쪽)와 신이현 작가
레돔이 봄의 텃밭에 쪼그리고 앉아 이것저것 올라오는 모든 것들을 보며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준다. 프랑스에서 가져온 씨앗들이 틔운 싹들이었다. 새로운 싹이 올라올 때마다 그는 멀리서 온 누이를 부르듯 감동적이고도 다정하게 이름을 부른다. 첫해에 우리는 모두 실패했다. 아티초크는 봄 가뭄에 말라버렸고 루바브는 여름 장맛비에 폭삭 썩어버렸고 세이지는 두더지가 들썩여 뿌리가 시들어버렸다. 그는 애통해했다. 다행히 지난해에 다시 심었던 루바브와 아티초크는 죽지 않았고 봄이 되자 뿌리에서 싹이 올라왔다.
“두더지를 보면 당장 신고해줘. 잡풀도 잎이 네 개 될 때까지는 뽑으면 안 돼.”
그 다음부터는 숲에 가서 들깨 씨를 뿌렸다. 나무들 사이에 싹이 나면 나만 알 터이니 누가 뭐라고 하는 일도 없겠지. 들깨 다섯 포기면 여름 내내 친구와 나눠 먹을 정도는 될 것이다. 깻잎 씨를 한 바가지 뿌렸는데 싹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 다음엔 거리의 화단에 깻잎 씨를 뿌려보았다. 이윽고 싹이 올라왔다. 귀여운 싹을 애지중지 좀 더 햇빛이 잘 드는 데로 옮기고 있는데 이를 본 약국 여자가 와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음… 그러니까 동양에서 가지고 온 난을 심고 있어. 여름에 하얀 꽃이 피지.”
쌀쌀맞게 생긴 금발의 약국 여자가 ‘오우’ 하면서 감탄했다. 왠지 기분 나빠서 더 이상 그쪽으로 가지 않았다. 하얀 깨꽃을 보고 약국 여자가 어떤 얼굴을 했을지 모르겠다. 다음 해엔 한국 친구가 정원 있는 집에 세를 얻게 되었다. 우리는 마당 한쪽의 잔디를 뽑고 거기에 깻잎을 심었지만 싹이 나오기 바쁘게 수백 마리의 달팽이들이 와서 뿌리까지 다 먹어버렸다. 결국 깻잎을 포기한 것은 달팽이 때문이 아니라 매일 정원의 꽃을 가꾸는 이웃이 우리에게 와서 무슨 꽃을 심느냐고 물었기 때문이었다.
깻잎을 완전히 포기한 뒤부터는 숲에 가서 쑥이나 냉이 같은 것이 있을까 찾아보기 시작했다. 5년쯤 지났을 때 마침내 쑥을 발견했다. 이것으로 국도 끓이고 떡도 해먹는다고 했더니 레돔과 시부모님이 그것은 잡풀이며 잘못 먹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강력하게 말렸다. ‘이, 이것이 얼마나 귀한 약재 나물인데!’ 나는 그들이 내 부모님을 모욕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보란 듯이 뜯어온 쑥을 말려서 차를 만들어 마셨지만 프랑스 쑥은 참 맛이 없었다. 그 뒤 시부모님은 이상한 잡풀만 보면 먹을 수 있는 것인지 내게 묻곤 했다.
신이현 작가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짓고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