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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복차림 기생단 앞장서 “만세”… 5000여 군중 함성 천지진동

입력 | 2019-03-23 03:00:00

[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46화> 경남 통영




1603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세병관(국보 제305호)은 ‘통영 삼도수군통제영’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일제는 민족정기 말살 정책에 따라 통제영 안에 있던 건물 100여 곳을 허물고 세병관을 통영공립보통학교 건물(작은 사진)로 사용했다. 통영=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통영문화원 제공

경남 통영시 한복판 여항산의 남쪽 기슭에 위치한 ‘통영 삼도수군통제영’에서 바라보면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통영중앙시장 앞 강구안 항구도 보인다.

충무공 이순신(1대)을 비롯한 삼도수군통제사(경상·전라·충청 3도의 수군을 총지휘하는 무관)들이 이끈 삼도수군통제영은 임진왜란 이후 해상 방어의 총사령부 역할을 했다. 왜선 70여 척을 상대로 학익진(鶴翼陣) 공격을 펼쳐 대승을 거둔 한산도대첩, 육상에 상륙해 노략질 중이던 왜선 21척을 격침시킨 당포해전이 모두 통영 앞바다에서 펼쳐졌다. 왜적의 항복을 받은 기념으로 지었다는 수항루(受降樓)도 통영에 있다.

이 같은 충무공 정신과 역사적 경험을 이어받은 통영 지역 주민들은 3·1운동 당시에도 격렬한 저항운동을 벌였다. 여기에는 항만 정비를 명분으로 일본인 집단거주지역을 확대하고 호시탐탐 경제적 침탈을 꾀하려는 일제에 대한 반발심도 있었다. 1919년 4월 2일 펼쳐진 부도정시장(지금의 통영중앙시장) 만세 시위에는 무려 5000여 명이 몰려 일제 군경을 쩔쩔매게 했다. 특히 기생과 유치원 보모 등 여성들이 앞장서 눈길을 끈다.

이명 통영 3·1동지회 사무국장은 “충무공이 쓴 난중일기에 나오는 ‘생즉사 사즉생’(生則死 死則生·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 정신이 예전부터 통영 시민들에게 뿌리 깊게 남아 있다”며 “통영의 격렬했던 일제에 대한 저항은 그 영향이 컸다고 본다”고 말했다.



○ 유치원 보모들이 먼저 외친 만세


3·1운동 며칠 뒤 통영경찰서에 첩보가 입수됐다. 서울의 고등보통학교 학생 여러 명이 통영읍에 잠입했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인 서장은 부하들을 닦달하며 경계를 강화했다.

첩보는 사실이었다. ‘경남지역 3·1독립운동사’와 ‘통영군사’ 등에 따르면 배재고등보통학교 출신인 진평헌은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한 뒤 요양을 핑계로 고향에 내려와 지인들에게 만세 시위를 제안했다. 진평헌과 통영면 서기 이학이 등 19명은 3월 8일 송정택 사랑방에 모여 3월 13일 장날 거사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태극기 제작, 독립선언서 등사, 기독교 신자 및 광부 동원 등의 역할을 정한 뒤 헤어졌다.

독립선언서를 구하지 못하자 진평헌은 ‘동포에게 격하노라’라는 제목의 격문을 직접 작성했고, 면사무소 2곳에서 등사판을 조달했다. 하지만 꼬리가 밟혔다. 한 청년이 선언서를 등사하기 위해 나카무라상점에서 미농지 2000여 장을 구입한 사실이 일제 감시망에 걸려든 것이었다. 10일 오전 1시경 통영면사무소에 등사판을 갖다 놓으려던 이학이 등 3명이 잠복 중이던 경찰에 체포됐고, 나머지는 오전 3시경 산양면사무소에서 만든 인쇄물을 갖고 통영읍으로 돌아오다 잡혔다.

당시 진평헌과 이학이는 부산에서 부임해 온 문복숙 김순이 등 유치원 보모들과도 연락하며 3월 13일 거사를 함께 일으키자고 입을 맞춘 상태였다. 보모들은 진평헌 등의 검거 소식을 듣고 단독으로 시위에 나서기로 했다. 마침내 거사일인 장날이 되자 이들은 부도정시장에 몰려나와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 만세를 선창했고, 군중들이 따라 만세를 외쳤다.

통영 최초의 만세 시위를 주도한 문복숙과 김순이는 현장에서 체포돼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부산감옥에 갇힌 문복숙은 형리가 옥중 소감을 묻자 종이와 붓 그리고 먹을 달라고 한 뒤 이렇게 썼다.

“너희가 태산을 떠다 옮길 수 있을지언정 태산같이 움직이지 않는 우리의 마음을 떠 옮기지 못할 것이며, 또 너희가 강철은 굽힐 수 있으나 강철같이 굳센 우리의 마음을 굽힐 수 없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문복숙과 같이 부산감옥에 수감됐던 김순이는 그해 9월 가출옥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다.



○ 통영 청년들의 항거

최초의 시위가 중간에 들통나고 사실상 거사에 실패한 뒤 통영의 주동자들은 다음 거사 준비에 들어갔다. 그사이에 다른 통영 청년들이 나섰다. 3월 18일 부도정시장 장날에 이성철·이봉철 형제가 ‘대한독립만세’라고 적은 깃발을 들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 체포됐다. 같은 날 한문학당 관란재의 17세 학생 박상건은 다른 학생 20여 명과 함께 오후 9시경 큰 소리로 만세를 외치며 부도정시장 주위에서 시위하다 붙잡혔다.

직접 시위하는 대신 경고문과 격문을 배포하는 이들도 나왔다. 3월 22일 아침 통영 시내에 ‘대한국 독립 만세! 25일 북장대에 집합 바람. 대한국 독립의 시기다. 왜놈의 세력에 놀라지 말자’라는 격문이 뿌려졌다. 일경은 통영이 발칵 뒤집힐 정도로 대대적인 범인 색출 작업을 벌였고, 통영면사무소 호적계 서기 김상진이 체포됐다.

권오진은 더 대담했다. ‘조선국민독립단’ 이름으로 작성한 격문 100여 장을 3월 28일 장날에 배포했다. 이어 일본의 내각총리대신과 조선총독 앞으로 ‘4월 말까지 독립승락서를 구 대한정부에 제출하라. 그러지 않을 경우에는 너희들 인종 전부를 몰살한다’는 협박문을 보냈다. 그는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된 뒤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 기생단의 활약이 돋보인 4·2 만세 시위

이후에도 통영의 독립에 대한 열기는 고조됐다. 통영의 시위 지도부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 위해 3월 26일 한자리에 모였다. 미국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귀국한 고채주를 비롯해 강윤조 김영중 박상건 김두옥 등이었다.

이들은 4월 2일 부도정시장 장날을 디데이로 정했다. 통영읍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에 널리 연락해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도록 했고, 결의문 1000여 장을 인쇄해 비밀리에 배포했다.

거사일인 장날이 밝자 부도정시장에 인파가 모여들었고, 오후 3시경에는 그 수가 5000여 명에 달했다.

시위 주동자들은 시장 한복판으로 파고들어 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시장 안 사람들이 같이 호응해 땅이 흔들린다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큰 소리로 만세를 외쳤다. 상인들도 장사를 접고 시위에 합류했다.

시위대는 부도정시장 바로 옆에 있던 통영경찰서로 방향을 틀었다. 당황한 일제 군경은 소방차 물펌프로 물을 뿌리며 시위대를 공격했다. 고채주 강윤조 등이 앞장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독려했다.

이때 소복 차림에 수건으로 허리를 둘러맨 기생단이 부도정시장에 도착했다. 통영예기조합 소속인 기생 33명은 손에 태극기를 들고 흔들며 목이 터지도록 만세를 불렀다. 예기치 못한 기생단의 동참에 군중들은 더욱 열광적으로 만세를 불렀다.

1920년대 통영예기조합 단체사진으로 당시 기생들의 옷차림을 살펴볼 수 있다 (왼쪽 사진). 기생단 시위를 주도한 정막래와 이소선에게 징역 6개월을 선고한 판결문이다. 통영문화원 제공

기생단 시위의 주동 인물은 정막래(당시 20세)와 이소선(19세)이었다. 대규모 시위 계획을 들은 두 사람은 2일 오전 10시경 다른 기생들에게 시위 동참을 권유하고 동의를 얻어 기생단을 조직했다. 정막래와 이소선은 자신들의 금비녀와 금반지를 판 돈으로 소복과 상장(喪章)용 핀, 짚신을 사서 기생들에게 나눠 줬다. 길야정(지금의 항남동)에 위치한 예기조합을 출발한 기생단은 우편국 앞을 지나 부도정시장에 도착한 뒤 시위에 나섰다.

1919년 4월에 작성된 일제의 판결문에 따르면 정막래와 이소선이 맨 앞에서 시위를 이끌었음을 알 수 있다. 판사는 일제 순사 3명의 보고서를 인용해 두 사람이 경찰의 제지에도 선두에 서서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고 지적했다. 또 군중이 남녀 단체(남성 주동자들과 기생단을 지칭)에 뇌동해 남자는 모자를, 여자는 치마를 치켜들고 열광적으로 만세를 절규해 소요를 극에 달하게 했다고 밝혔다.

기생들은 체포돼 온갖 수모와 고문을 당했으나 위축되지 않았다. ‘독립운동사’ 등에 따르면 이소선은 법정에서 일제 판사에게 이렇게 따져 물었다고 한다.

“나는 여성으로서 본부(本夫)와 간부(姦夫)가 있는데 어느 남편을 받들어 섬겨야 여자의 도리에 합당하겠습니까?”(이소선)

“물론 본부를 섬기는 것이 당연하지.”(판사)

“그러니 우리가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여자가 본부를 찾아 섬기려 함과 같은 이치이니, 무엇이 죄가 된다는 말이오.”(이소선)

이에 판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퇴정했다.

정막래와 이소선은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마산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고 얼굴 사진도 남아 있지 않다. 정부는 2008년 정막래와 이소선에게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 하와이서 독립운동하다 귀국… 58세 고령에도 ‘물대포’ 맞으며 시위 앞장 ▼

4·2만세운동 주도 고채주
통영향교 ‘장의’로 민족의식 고취… 이학이-허장완과 함께 ‘3열사’로

통영 부도정시장 4·2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주도한 사람들 중에는 미국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귀국한 인사도 있었다. 1919년 당시 58세의 나이에 시위대의 맨 앞에서 소방호스 물을 맞아가며 독립 만세를 외친 고채주(1861∼1920·사진·건국훈장 애국장)다.

통영향교 장의(掌議)였던 그는 시위 주동자로 체포돼 징역 1년을 선고받은 뒤 감옥 생활을 하다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심한 고문의 여독으로 자택에서 숨졌다. 통영에선 그를 기미년 만세운동 3열사로 부른다. 나머지는 이학이와 허장완이다. 원문공원에 있는 3·1운동기념비 옆에 그의 묘비가 있다.

‘통영군사’와 후손들의 증언에 따르면 고채주는 40세였던 1901년 이민선을 타고 하와이로 건너갔다. 적지 않은 나이에 도미(渡美)한 이유는 열강들의 각축장이 된 조국의 현실을 걱정하면서 힘을 기르기 위해서였다. 발달된 서양 문물을 배우고 익혀 동포들을 널리 깨우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고채주는 하와이의 막가월리 농장에서 육체노동을 하며 한인 교포들을 규합했다. 그는 교포들의 단결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1906년 송건 홍정표 이묵원 등과 함께 ‘자강회’를 조직하고 월보를 발행하기도 했다. 또 하와이에서 20여 개의 교포단체가 난립하는 것을 보고 이듬해 호놀룰루에서 ‘한인합성협회’로 통합하는 데 앞장섰다. 1909년에는 하와이의 합성협회와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협회 등 미주 지역 한인단체들을 하나로 통합한 ‘국민회’의 산파역을 맡았고, 같은 해 귀국했다.

대구감옥에 수감된 고채주는 심한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다. 일제는 묘비 뒤에 새겨진 독립운동 공적을 읽지 못하도록 훼손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통영=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고채주의 후손인 고석윤 통영 3·1동지회 회장은 그가 귀국한 이유에 대해 “특별한 밀명(密命)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후손들이 1978년 당시 원호처(현 국가보훈처)에 제출한 공적 개요에 따르면 고채주는 귀국 후 통영향교 장의로 활동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또 일제의 감시를 피해 미주의 국민회와 상하이 임시정부 사이의 연락책으로서 군자금 조달 등 지하운동을 펼쳤다.

통영=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